《백기도연대 풍》
참 정신없다. 이 소설뿐 아니라,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사납다. 무서운 얼굴에 카리스마 만땅이고 안락의자 탐정이자 실질적인 수습인 역을 하는 주젠지 아키히코는 수다쟁이고, 이 책의 핵심 인물인 에노키즈 레이지로는 움직이는 폭탄이다. 오랜만에 아키히코와 친구들을 만났더니 아이고 한숨부터 나온다.

《백기도연대 풍》은 전작 《백기도연대 우》와 이어져 있다. 전작에서는 이름도 없이 하인 노릇을 하던 이의 성이 마지막 장에서 밝혀지고, 이번 작품에서는 그의 이름이 마지막 장에서 밝혀진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범용한’ 그의 갈등과 반성과 자학과 분노가 여기저기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그 밖에 이 책의 핵심은 고양이이고, 핵심어는 ‘야옹’이다. 나머지는 교고쿠 나쓰히코의 소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는 구조.

그런데 전작보다 더 많이 웃었다. 천천히 아껴 읽으려다가 하루에 하나씩 읽고 말았는데, 새벽에 조용한 집에서 웃음을 참느라 참 고생했다. 늘 생각하지만, 이 일당 중에서 가장 귀여운 사람은 역시 아키히코다. 투덜이 스머프와 똘똘이 스머프를 더한 것 같은 캐릭터면서 결국 뒷수습은 혼자 다하고, 그러면서 은근히 즐기는 인간. 레이지로도 물론 귀엽다. 이 인간은 뭐 귀여운 거 빼면 시체지. 이번 책에서는 전작에 탄력 받아서 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이 친구의 천방지축 천진난만(은 아닌가;) 활약에 침대에서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세 편 모두 유쾌하고, 즐거운 소품이다. 특히 두 번째 작품은 그간의 이 친구들 출연작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활극으로, 이 작품과 뒤이은 세 번째 작품은 에노키즈 레이지로라는 사람을 스케치할 수 있게 해 준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장편은 참 어둡고 음습하며 무섭다. 《우부메의 여름》부터 《광골의 꿈》까지 각 사건의 정황이나 인물의 내면을 보고 있으면 달리 공포소설이 없다. 다른 작가가 썼다면 이 정도의 느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한다. 기본적으로 교고쿠 나쓰히코의 글이 건조하기 때문인 것 같다. 축축한 느낌이 없다. 그리고 거기에 저놈의 장광설과 삼천포와 에노키즈 레이지로가 끔찍한 이야기들의 반대편에 있으면서,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주젠지 아키히코와 함께 균형을 잡아 주는 게 아닐까. 사실 제정신으로 살아 있는 게 용하고 기특하기까지 한 레이지로의 에너지는 만만치 않다.

《백기도연대 풍》은 그런 레이지로의 면모가 아낌없이 드러나기 때문에 밝다. 쓸데없는 수다도 많다. 아아, 정말이지, 모르고 몰라도 되고 모르고 싶은 이야기를 끝없이 떠드는 데는 돌겠더라. 이야기가 진척이 안 되고 수다로 한나절이다. 사건을 설명하는 시작 문장을 다음 이야기로 넘기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리는 소설가가 있을까. 간만에 만난 아키히코의 수다에, ‘넌 참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라며 웃던 옛 초등학교 동창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사람 변하기가 어디 그리 쉽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쳇. 그래도 이번엔 장편처럼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되는 장광설이 아니어서 건너뛰고 읽어도 될 정도다. 그러니까 그냥 정말 수다. 이 수다쟁이 교고쿠 나쓰히코얏!

그럼에도 이미 그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장편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마당에 이 《백기도연대 풍》을 홀랑 읽어 버렸다는 사실은 눈물 나게 아쉽다. 무서운 얼굴로 씨익 웃는 아키히코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즐거웠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면서 사고를 치던 레이지로의 ‘야옹’ 소리에 포복절도했건만, 저 두꺼운 책이 끝나고야 말았구나. 장편이든 단편이든 내게 그의 책을 주세요. 이번처럼 하던 일 집어던지고 새벽에 행복하게 읽을 테니. 훌쩍.
2008/08/25 04:59 2008/08/25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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