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술 마시면 알코올중독 시작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그래서 대학 때 선배가 “요즘 집에 가는 길에 포장마차에서 혼자 한잔하고 가.”라고 했을 때 “형! 그럼 안 돼!!! 그거 알코올중독 시작이래요! 우엥!” 이러면서 뜯어말리고 그랬다. 정말 혼자 마시는 술은 절대절대절대 하면 안 되는 금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아, 그런데 나이 먹으니 아무렴 어떠냐 싶어지는 것이, 내 블로그 드나드시는 분이야 이미 아시겠지만, 지금은 혼자 마시는 술을 엄청 즐긴다.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맥주 한 상자 정도가 어딘가에 있고, 생각나면 하나씩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천천히 마시는 일을, 온 가족이 나 몰라라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뭐, 사실 처음부터 가족들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주 마시는 편도 아니고 가끔 잦아질 때도 한 병을 넘기는 일이 드물어서일까, 라고 갸웃하다 보니, 많이 드시지는 않아도 부모님의 술자리가 내 술자리 혹은 나 혼자 마시는 날보다 더 잦다. 하하하;

물론 친구와 마시는 자리는 즐겁다. 오래된 친구라면 더욱 좋다. 얼마 전에 boreas, mick과 그 여자친구, June 양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의정부에서 멀고도 먼 합정이어서 무지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사실은 참 즐거웠다. 지난달에 이젠 이십 년도 넘은 친구 둘과 생일을 축하한답시고 앉아서 술을 마셨다. 이건 정말 뭐라고 말할 나위가 없을 정도로 좋다. 취해도 좋고 맛이 가도 좋고, 말짱해도 좋고, 헤롱대도 좋고. 가끔 찾아오는 침묵의 시간마저 사랑스러운 자리.

하지만 혼자 마시는 자리는 그 나름의 맛을 갖는다. 한 병을 가지고 한 시간을 마시든 김빠지게 두 시간을 마시든 좋고, 멍하니 노트북으로 서핑하면서 마셔도 좋고 좀 더 예민해진 귀로 음악을 들으면서 마셔도 좋고 창밖의 풍경에 넋을 놓고 마셔도 좋다. 특히 새벽에 마시는 술은 ‘작살’이다. 인적이 가라앉은 시간, 혼자가 주는 그 고적. 올려다본 하늘에 운 좋게 별이든 달이든 걸려 있으면 금상첨화.

외로운 마음도 쓸쓸한 기분도 언제나 품고 있다면 그야말로 괴롭겠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렇게 혼자 되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혼자 가는 여행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열린 상태로 완전한 타인을 받아들일 상태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부재를 느끼면서 그들의 존재를 원하면서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은 그래서 기특하다. 혼자 있음이 즐거운 만큼 사람을 아끼게 된다. 난 혼자 술을 마시면서 한 번도 우울한 적이 없었다(우울하면 술 안 마셔. 그러면 난 추해.). 혼자 차를 마시는 시간도 즐겁다. 그러나 혼자 술을 마시는 시간은 약간 특별하다. 한 병이든 한 잔이든 술이 들어가면 마음이 달라진다. 취하지는 않더라도 살짝 알딸딸한 느낌. 그리고 조금 민감해진 마음과 몸이 많은 것을 자극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친구들과 마시는 술자리에서 갖는 기쁨과 맞교환되는 감각이지 싶다.

이젠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고, 술자리 자체도 아주 드물어졌다. 술은 여전히 좋아한다. 사람을 사귀는 일도 서툴고, 사귈 일도 이젠 드물지만 사람은 여전히 좋아한다. 다 같다. 전 같지 않지만 좋아하는 것은 여전히 좋아한다.

아마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혼자 갖는 이 술자리가 더욱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2008/08/24 01:06 2008/08/24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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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 2008/08/24 13:0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새벽에 편의점에 나가 맥주 두 병과 아주 오랜만에 와인을 사왔어요. 원고를 하나 끝내놓고 느긋하게 마시는 맥주 두 캔, 좋더라고요.
    우리 모두 나이가 들었구나, 절절하게 느꼈던 그 어느 날 이후, 글 쓰면서 와인 마시는 요상하고 돈 많이 드는 버릇이 든 이후는 더욱, 혼자 술을 마시는 게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는. 여럿이 마시는 자리에서 제가 종종 추해지더라고요. 너무 하이퍼해져서 술자리가 끝나는 순간을 못 견뎌하기도 하고. 지금은 자제중이에요. 뭐 시간도 없었지만...

    • JIYO 2008/08/24 15:21  address  modify │ delete

      네 아이디가 거론되는 포스팅에는 나 몰라라 하다가 '술!' 나오니까 댓글이냐? 좀 전에 일어나서 너랑 준식이 댓글 보고, 쓸 놈들이 썼구나 싶어 혼자 피식 웃었다.

      와인 마시면서 글 쓰는 거 생각보다 돈 많이 깨지지는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난 워낙 와인 몰라서, 그때 그 얘기 듣고 좋겠다 생각했는데.

      사람 모인 자리도 좋지만, 혼자 갖는 시간도 중요하니까. 나중에 시간 만들어서 혜화나 너희 집 근처서 한번 보자고.

    • N. 2008/08/24 22:07  address  modify │ delete

      아니 언니가 그렇게 사람을 띄워놔서리, 뭐라고 글 달기가 너무 민망하잖아요.ㅎㅎㅎ 게다가 '절대악' 관련한 건 다른 사람들과 제가 그렇게까지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 걸 확인한 뒤, 제가 의도한 대로 글을 제대로 못 썼구나 싶어 그거 관련해서는 다른 말을 붙이기가 상당히 애매하더라고요.

      글쓸 때 마시는 와인, 일명 작업용 와인이 돈이 많이 안 드는 건 사실이지만, 요즘은 그걸 사는 것마저 상당히 부담스러운 절대적 자금난 상태예요. 에효.

    • JIYO 2008/08/25 01:05  address  modify │ delete

      민망하라고 그랬지. 키키키. 좋잖아. ^^ 문유 님의 '세익스피어식 선/악' 해석도 좋더라. 많은 글에서도 찾지 못했던 답 중 하나를 찾은 기분이었어. 하지만 역시 수작이긴 해도 이 정도의 '열기'는 좀 당혹스러워. 난 그냥 배트맨이 열라 멋지게 싸울 때가 젤로 좋더만.

      나도 요즘 돈이 딱 말랐는데 기껏 카드로 긁은 물건이 '상품 가치' 자체가 없는 거여서, 지금 그 인터넷 쇼핑몰과 전쟁 준비 중. 액세서리는 교환/환불 불가라는 원칙만 내세우고 있어서, 잘하면 '제대로' 붙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기가 막혀서 그렇게 할까 생각해.
      하긴 돈 있어도 이건 아니겠구나. 그래도 이렇게 가난한데 그러니 더 열받더라. 제길.

  2. 황준식 2008/08/24 14:2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냉장고에 들어찬 맥주병의 갯수는 바로 행복의 척도가 된다지. 아마도.
    사무엘 아담스 섬머 에일이 나오는 계절이라 요즘은 그걸로 고 고 고.

    • JIYO 2008/08/24 15:25  address  modify │ delete

      뭐냐, 너 지금 잠수 중 아니었어? 메일 보내도 답도 없고. -_-+
      그나저나 사무엘 아담스 가지고 너 몇 년째 사람 속을 뒤집는 거냐. 난 섬머 에일은 둘째 치고 사무엘 아담스 못 마신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 맛이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아. 부럽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