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까지 상찬 일색이 된 영화는 참으로 오랜만인 듯한데, 그 큰 부분을 조커와 조커 역의 히스 레저가 차지하고 있다. 처음부터 악의 유혹에 시험을 받는 배트맨을 보고 싶었지만 조커에 대한 엄청난 평가에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졌다. 좋았다.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히스 레저의 연기는 참 좋았다. 하지만 조커는 모르겠다.

- 여전히 내 시선은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에 가 있다. 사람마다 이 영화를 ‘고담시의 영화’, ‘조커의 영화’ 등으로 말하는데 내겐 여전히 배트맨의 영화다. 《배트맨 비긴즈》의 애송이 배트맨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를 보여 주는 영화. 그리고 그 완성을 돕는 인물이 조커. 브루스 웨인은 아버지가 사랑한 도시를 지키고자 하는 속죄 의식, 사랑받고 자란 이의 믿음과 자신감, 정의감 같은 것만으로는 배트맨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 물론 소파에 앉아 이럴 줄은 몰랐다면서 당혹해하는 브루스를 보면서는 아이고 이 사람아 그 정도도 각오하지 않고 이런 큰일을 벌였단 말이냐 하고 장탄식을 했지만,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의 규모와 에너지를 완벽하게 짐작할 수는 없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 좀 다른 이야기. 난 선악이 대단히 자의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저 ‘절대악’‘순수악’이란 표현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N.은 신의 선에 대립하는 악이라고 천명한바, 그쪽은 이해가 되고 이 영화가 N.이 보듯 기독교의 예수와 악마 이야기의 《배트맨》식 재해석이라고 하면 대단히 잘 들어맞는 것도 사실이다. 거기에는 반론할 생각 없다(언감생심 내가 어디서 N.한테 덤비냐;;;).

다만 이 영화 관련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절대’ 악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지. 간단히 말해서 내게 ‘악’이란 내게 나쁜 것이다. 너무 제멋대로라고? 하지만 역대로 선악은 분명하게 경계가 없었다. 어제의 선이 오늘의 악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질서가 선인 이유는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조커한테는 혼란이 편했을 수 있겠고.

조커가 동기도 목적도 없이 순수하게 혼란을 위해 움직였기 때문에? 아니 동기랑 목적 있으면 악하지 않은 거야? 악의 우선순위가 있나? 아니 정말, 이거 시비 아니고 몰라서. 그럼 결국 혼란이 목적인 거잖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조커지만, 내가 좀 약해 보인 이유는 그가 사랑받고 자라지 못했단 티가 너무 나서, 선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인 것 같다. 내게는 오히려 《팔운성》의 마사키 같은 인간이 더 이해가 안 돼. -_-; (좋은 집에서 잘 자랐으나 문득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시작된 세상 파괴 계획. 이놈도 일신의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선을 알고 그걸 이용해 먹을 정도는 돼 주면 더 좋았겠다고나.

사람에게 ‘악’이 근원이라고 해도 별로 부정할 생각은 없는데, 사람이 충분히 이기적이어도 공생하는 결과가 가능하다는 게 그 배의 기폭장치 장면이잖아. 적어도 가만히 있으면 12시까지는 살 수 있지만, 기폭장치 돌리면 세 척 다 당장 죽는 거 아냐. 어떤 블로그에서 사람들이 투표하는 장면이 벌써 조커에게 졌다는 의미라고 하는 글을 봤는데, 그 정도 갈등도 안 하면 그게 사람인가요. 전 배 안에서 열두 번도 더 고민했을 거 같은데요(사족이지만, 난 어째 알프레드는 조커의 선택 시험에 안 당할 거 같다; 난 이 할아버지가 제일 무서움.).

뭐 난 어차피 조커 같은 애가 선택지 주면 여지없이 흔들릴 인간이란 거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내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투페이스 욕할 자신도 없고(투페이스의 패인은 ‘난 언제나 괜찮아’ 마인드라고 보지만). 사람은 다 그렇게 약하고 악하고 그래서 선하다.

- 너무나 전형적인 ‘선인’ 레이첼이 죽어 줘서 배트맨 좋아하는 사람은 감사하다. 너무나 전형적이어서, 그런데도 배트맨이 또 너무 사랑해서 얘가 살아 있으면 배트맨은 많이 힘들어진다. 존재 자체가 배트맨을 지나치게 몰아세워;;; 미안하다, 레이첼.

- 인터넷 세상은 요즘 이 영화로 들썩들썩하다. 많은 분석과 평과 대화가 오가고 있다. 블록버스터를 볼 때 일정 정도 포기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거 없이 정면승부하면서도 이 정도 분위기를 끌어낸다는 점만으로도 대단한 영화구나 싶다. 게다가 눈과 귀도 호사를 한다. 아이맥스로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용산으로 가느냐 일산으로 가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앗, 둘 다 산이다. -_-;
2008/08/15 17:38 2008/08/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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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루릴 2008/08/16 03:2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워낙 여기서도 유명해서 볼까 하다가 몇년을 시도해도 베트맨은 내 취향과는 너무 멀어서 안보기로 했어요. 여튼 사람들이 모이면 이 영화 얘기만 하더이다. -_-;
    용산이 더 낫겠죠. 그래도 누가 뭐래도 지하철 닿는 곳으로~~!

    • JIYO 2008/08/16 03:49  address  modify │ delete

      너 좋아할 거 같은데... 내용은 둘째 치고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화면 좋아. 그것만으로도 본전 뽑지 싶다. 나중에 후회 말고 극장서 보셔. ^^
      시설은 일산이 나아. 심지어 의정부에서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으심. 것도 집 앞에서. 그러니까 갈등이지, 이 사람아.

  2. lunamoth 2008/08/17 00: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영화더군요. 그래도 언터처블, 야수... 등에서의 정의감 충만한 검사/형사역들의 들뜬 자신감 같은것에 매료돼서 일까요? 제겐 하비 덴트의 영화로 기억될듯 싶고요...

    확실히 칼로 무 베듯 나뉠 성질은 아니지만, ("오직 9개의 성격 유형이 있다고 생각하고 애니어그램을 따른다"는 얘긴 아니지만...) 절대선, 중도, 혼돈악 단어들에서 문득 가치관 테스트가 http://snipurl.com/3gvja 생각나 다시 테스트해보니 저는 Chaotic Good 쪽이더군요. 하비 덴트에 끌리는것도 그래서일까요? 허허;

    • JIYO 2008/08/17 02:14  address  modify │ delete

      음... 전 '중립' 나왔습니다(영어라 고생 '좀' 했습니다.). ^^ 기본적으로 선악과 질서/혼돈 개념 자체가 제게는 그다지 강하지 않아요(서구화가 좀 덜 된 인간이기도 하고;). 썼듯, 내가 좋으면 장땡인데 '정의감'이라는 것 자체도 자기 최면이라고 보거든요. 순식간에 무너지는 하비 덴트를 보세요. 그에게도 정의란 다 자기가 좋을 때 정의인 거죠. 다른 사람이 봤을 때도 그의 후반 행동이 정의로 보이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니까. 그에게만 정의일 뿐. 결국 그 '정의'도 대단히 상대적이고 자의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압도적 패배감'이 왜 드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가끔 비슷한 글이 있는 블로그를 보는데, 모르겠어요. ㅠ.ㅠ 이 영화가 잘된 영화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이 정도의 '악'과 '타락'을 다룬 영화는 많지 않나요? 아아, 제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 좀 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