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하게 튼 에어컨은 괴롭지만 더운 날 일 보러 잠깐 들어가는 은행의 냉기는 모든 걸 용서하게 한다. 환경오염이니 뭐니 해도 그 순간만은 에어컨의 존재가 정말 감사하다. 땀을 식힌 뒤에 땡볕이 작열하는 밖으로 나가려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걷다 보면 온몸이 따끔따끔하고 눈두덩이 뜨끈뜨끈하다. 겨드랑이에서 흐르는 땀이 옷을 적셔 달라붙는 그 찝찝함. 등에 붙은 옷감의 답답함.

올해 내 목표 중 하나가 ‘치마와 친해지기’인데 처음에는 불편하기 그지없던 이 치마가 지금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 같다. -_-; 더운 볕 아래에서 운동하러 걸어갈 자신이 없어서(40분에서 50분 소요) 제일 늦은 시간을 다니는데 그래도 걷다 보면 역시 덥다. 이때 치마를 입고 간다. 한동안 그러고 다녔더니 반바지도 입고 싶지 않아졌다. 다리 사이로 바람이 통하는 게 이렇게 가뿐한 거구나. 허벅지와 종아리에 옷감이 붙어 있지 않은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집에서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이제 그것도 치마로 바꾸고 싶어졌다. 치마 만세!

덥다 덥다 하면서도 난 사실 여태 선풍기 한 번 켜지 않았다(좀 전에 드디어! 켰다가 결국 5분도 못 돌리고 껐다.). 순전히 귀찮아서; 난 정말 게으른 인간이라 한번 문명의 이기에 맛을 들이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물론 선풍기 바람을 계속 맞고 있으면 땀구멍이 막히는 듯한 답답한 기분이 들어 싫기도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더운데 아무렴 어떠리. 그저 일단은 정말 선풍기를 근처에 갖다 놓고 콘센트에 꽂고 단추를 누르는 것 자체가 귀찮고, 그다음에는 내내 그 녀석한테 매여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을 뿐이다.

이사 올 때 어머니께서 에어컨을 살까 하실 때도 반대했다. 있으면 쓰게 되고 쓰면 없이 못 산다. 아마 난 그럴 것이다. 조금만 더워도 참지 못할 테고 에어컨을 켜고 싶어 하겠지. 그래도 여름은 더운 맛인데, 밖에 잘 나가지 않는 난 에어컨이 있으면 창 꼭꼭 닫고 더운 밖을 원망하면서 저녁이면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좋은 줄도 모를 거다. 난 그러고도 남는다.

창을 활짝 열어 놓는다. 한 이틀은 바람도 안 불어서 정말정말정말 더웠다. 이렇게 더울 때는 선풍기도 소용없다. 욕실로 가서 양치 컵에 물을 가득 붓고 양쪽 종아리에 살살 끼얹은 뒤 나오는 게 내 요즘 더위 식히기 방법 중 하나다. 그래도 그 더운 이틀간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더라. 이달 말까지 마칠 일을 해야 하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노트북 들고 단골 카페라도 갈까 하다가, 이 더운데 노트북 업고 카페까지 갈 생각을 하니 벌써 일사병이 나는 기분이더라. 늘어진다, 늘어져.

그래도 여름은 더운 맛이다. 이 쨍한 여름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가을이 엷게 느껴진다. 너무나도 쨍해서 어두운 풍경들. 눈부신 햇살. 걷기도 두려운 열기. 보기만 해도 시원한 아가씨들. 찐 옥수수 냄새와 복숭아, 자두. 상쾌한 소나기. 종아리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가 고마운 때. 하루를 버티기만 해도 밤이면 잠이 솔솔 오는 계절(아니 실은 수시로 졸리긴 하지.).

이렇게 어쩐지 치열해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한 해가 다 간 것 같고 뭔가 허무한 듯한 기분이 드나 보다. 더워서 죽겠는데도 여름이 간다고 생각하면 왠지 마음이 좋지 않다. 불안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그치만 이미 말복도 갔고, 입추도 지나 버렸는걸.

점점 세월이 빠르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늙었구나, 늙었어. 어흑.
이 더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내년이면 부모님은 또 에어컨을 살까 말까 고민하시겠지. 난 뭐 하고 있으려나.
일단은 눈앞의 일부터 해치우자. 종아리에 물 좀 뿌리고 와서.
2008/08/10 18:30 2008/08/1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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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입을 수 없는 옷이 있다

    Tracked from 달이 즈믄 가람에 2008/08/22 23:27  delete

    ▷ 청바지를 입어 보다.중학교 시절부터 청바지를 즐겼던 것 같다.업무 특성상 광산노동자의 데님(denim) 바지로부터 유래한 것인만큼아무데서나 구르고 뛰어다녀도 튼튼했다.물감이 튀어 묻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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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une 2008/08/11 00:5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선풍기 껐을 때의 먹먹한 느낌이 싫어서 선풍기 잘 안 트는 편인데 방 온도가 35도까지 올라가는 상황에서는 도리 없이 선풍기를 켜고 맙니다. 며칠 전에는 급기야 커다란 대야에 물까지 받아다 발을 담그기 시작했죠. 아, 정말 너무 더워요. 여름이 가는 건 저도 좀 아쉽지만 요즘에는 가을에 하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각나면서 가을을 기다리게 된다는^^

    • JIYO 2008/08/11 08:07  address  modify │ delete

      정말 바람 없이 온도가 꼬물꼬물 올라가는 걸 느낄 때는 죽을 거 같아요. 어제 낮에 좀 그러더니 새벽엔 낫던데, 부모님은 힘들었다고 하시는군요. 아침은 아주 시원해요, 가을처럼. 바람이 솔솔 부십니다그려. 이제 자야지. 호호.
      일단 발에 물 뿌리면 좀 낫죠. 예전엔 대야에 물 받아 발 담그고 책 읽는 게 제일 좋았는데, 어쩌다 컴퓨터란 게 날 이 모양으로 만들었을까요. Orz

  2. 이루릴 2008/08/11 05:5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캘리포니아의 필수품: 자동차, 에어콘, 선글라스요.
    치마입은 사진 보내줘요. 부츠 없는 치마가 상상이 안가요.

    • JIYO 2008/08/11 08:09  address  modify │ delete

      그래, 캘리포니아는 그렇다더라. 더한 애리조나 날씨에도 여태 자동차 없이 버티던 황모 준식 군도 있긴 했다만.
      내가 참... 여러 가지 사진 보내고 싶어서 이 짓 저 짓 하고 있다만, 치마 입은 사진도 찍어야 하는 거냐? 으, 우찌 찍어야 잘나오려나...;

  3. 자줏빛노을 2008/08/11 15:4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 전 남자라서 아무리 더워도 치마는 못입습니다만..(먼산)

    전 에어컨이 달려있음에도 진짜 잘 버텼습니다;;;
    (어제부터 틀기 시작했군요 온도가 31도가 넘어서면서 부터..)
    있는데도 안 틀려니까 정말 고역이긴 합니다만, 인내심은 늘더군요. ^^;;

    지요님도 이 기회에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한번 사보심이? -탕탕탕

    • JIYO 2008/08/11 22:28  address  modify │ delete

      뭐 치마를 생각하면 '여자라서 행복해요~' 이런 거 가능하죠. 호호.
      근데 전 에어컨 있으면서 버티기 못할 거 같아요. 원래 인내심이라면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인간이라...; 그걸 위해 그 돈을 들이기는 어렵지 싶습니다. 지구 따위! 하면서 그냥 틀어버릴 거예요. -_-;

  4. lunamoth 2008/08/12 15:5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더워서 밤새 자다깨길 반복하고 있는것 같네요;; 일어나서 약풍으로 한참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를 보고 문득 식겁하기도합니다 (선풍기괴담;;) 예 뭐 여름도 금방이겠지요 허허

    • JIYO 2008/08/12 17:26  address  modify │ delete

      달나방 님이 사무실에서 시원하게 일하시는 낮에는 인사불성으로 죽어가고, 달나방 님이 집에서 자다 깨시는 밤과 새벽에는 밤바람 맞으며 놉니다. (결론: 일 안 함;)
      이번 여름 가면 왠지 섭섭할 것 같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