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만나 수다 잔치를 벌이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에 들어와 뒹굴다가 새벽 내내 소설 세 권을 읽었다. 이 소설이란 건, 내 생전 처음 산 개인지. 가끔 인터넷에 뜨는 BL소설을 보는 정도에서 더 욕심을 내지 않았는데 한 작가의 소설을 계속 보다 보니 캐릭터에 이입이 되면서 뒷얘기가 궁금해지더란. (분명히 한 번 읽고 나면 버릴 텐데 여러 가지 대비로 확실히 비싼 이 개인지들에 과연 내가 돈을 쓸 필요가 있는가) 몇 달을 고민하다가 호기심 승리.

새벽에 세 권째 소설을 완독한 뒤 천장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 버려야 하는 거구나. 남 주기도 그런 이 소설의 처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 월요일 저녁에 재활용 쓰레기 버릴 때 조용히 내놓으면 끝이겠다. 기분이 참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자고 일어나 이러저러 인터넷 서핑을 하며 돌아다니다가 오래전에 소문만 들었던 BL 잡지 《뷰티풀 라이프》의 홈페이지까지 가게 됐다(위키, 잘났다, 이 녀석아. 그러나 서핑은 BL과 상관없었음;;;). 홈페이지를 좀 둘러보려는데 로긴하란다. 아 나 이럴 때마다 짜증나는데 제발 이런 홈페이지나 카페 만들면서 네이버 좀 그만 쓰면 안 됩니까. 난 네이버에 가입도 안 했단 말입니다. 한때 열풍이 불어 모든 생활권 친구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던 싸이에도 가입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왜 네이버에 가입하냔 말입니다. 이래서 못 읽는 글이 얼마나 많은지. 친구네 블로그에는 댓글도 못 단다. 저도 메이저가 좋아요. 음악도 메이저가 마이너보다 듣기 편하잖아요(물론 마음을 움직이는 건 마이너일 때가 많지만.). 나도 주류 같은 거 해 보고 싶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건데 왜 가입을 안 하면 글도 못 보냔 말입니다. 아니 개인 홈페이지라거나 개인적 취향의 소모임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여러 사람이 들락날락하고 많은 사람이 보면 좋은 홈페이지라면 그냥 공개가 낫지 않나요. 이럴 때마다 좌절 먹습니다. 흑.

하지만 그보다 더 내게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BL. 한때 ‘야오이’로 불리던 BL이 시장 흐름에서 주류(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시장’에서의 판매나 구매자의 몰입도로 봤을 때는 맞다고 본다.)를 차지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장르의 다양화는 좋은 일이고 나 역시 즐기는 분야인데, ‘대세는 BL'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은 좀 색다르다. 나 스스로 보면서도 의아하고, 왜 이 장르가 대세가 되는지, 이 흐름에 깔려 있는 정서는 대체 무엇인지 정말 오래도록 궁금했지만, 아직 윤곽만 어림할 뿐 명확한 개념은 오지 않는다(올 리가 없지. 내가 뭐라고 이 사회과학적인 분석이 가능하겠냐.).

물론 똑같은 이야기라도 그 주인공이 ‘남녀’인지 ‘남남’인지에 따라 느낌이 확연히 다른 건 사실이다. 언젠가 요시나가 후미도 ‘여성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무엇인가’에서 자유롭다고 느꼈기 때문에 BL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 것처럼, 여성임에도 여성이기 때문에, 아니 바로 그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번거롭고 접근하고 싶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건 안다. 그리고 그럼에도 늘 친구들에게 말하듯, BL을 보다 보면 상대적 박탈감과 여성으로서의 주변화를 강하게 느낀다. 여성이 여성을 위한 만화를 그리면서 여성을 부정하는 기분. 남성의 성 판타지인 포르노에서의 여성들은 주인공에 이입된 남성들(대체로 포르노 만화의 남자들은 평범한 인물이고 성적인 장면에서는 여자의 반응만 나오지 남자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을 위한 대상이지만, 여성의 성 판타지인 BL에서 남성들은 조금 다르다. 요즘은 꽤 BL을 즐기는 양상이 다양해져서(하드해지기도 했고;) 전처럼 ‘수’에만 이입하는 이야기 외에도 이미 여러 종류의 BL이 나와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 성 판타지를 즐기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이다(이 부분은 말도 길어지고 나도 정리가 덜 되었으니 여기까지.).

나 역시 같은 내용이라도 BL 쪽이 헐리퀸보다 편하다. 왜일까. 이입을 원하지 않기 때문인가. BL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강간이나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그런 맥락일까(레이디스코믹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확실히 그러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향해 가는 ‘절대’. 그것이 보여 주는 어떤 ‘바람’.

남자들 사이의 우정을 여자가 자기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이 BL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성과 여성이 동성끼리 갖는 관계 양상은 퍽 다르다. 남성용 포르노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손에 무너지지만, 여성용 포르노(BL 한정)의 남자들은 여성의 손에 무너지지 않는다. 여성은 배제된 사회이기도 하고(이 점에서 요시나가 후미가 다시 놀라운데, 그녀의 BL에서 여성은 물론 주인공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척되거나 무시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BL은 여성이 동성과 이성 간의 ‘관계’에 대한 시선, 여성 자신에 대한 시선, 세상을 보는 시선이 모두 모인 장르가 아닌가 할 때가 있다.

어쩌다가 사이트 한번 잘못 이동해서 갖은 잡상이 들어 끼적였다. 잡상이니만큼 어수선하고 기본적인 용어나 정의도 난삽하니 혹시라도 읽은 분들은 알아서 수습하시길 바라는 마음.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이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일어를 공부해야 하겠구나 싶다. 아무래도 이 분야의 '개척자/리더'라 관련 글이나 논문도 좀 있는 듯해서. 그렇지만 이걸 위해 다양한 BL을 보고 싶지는 않은데;;; 마찬가지로 이걸 위해 여성학 공부를 하고 싶지도 않고;;;
2008/07/27 20:16 2008/07/27 20:16

2008/07/27 20:16



트랙백 주소: http://textgarden.net/blog/trackback/80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