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고리 소콜로프를 알게 된 건 고클래식 사이트에서였다. 폴리니 관련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사이트였고, 거기에는 쇼팽의 《전주곡》의 최고 연주로 폴리니와 그의 음반을 꼽고 있었다. 그때 음반을 판매하는 곳을 검색해도 소문처럼 그의 음반은 없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나중에 어둠의 경로로 그의 음원을 구할 수 있었다. 전에도 얼핏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는 ‘괴물’이다.

대충 사람이 하나를 잘하면 하나를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도 어떤 작곡가는 잘 치고 어떤 작곡가는 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온다. 그런데 이 소콜로프는 듣다가 ‘야 이 짐승아’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어느 하나 떨어지는 느낌이 없다. 어디 한번 하는 마음으로 들었던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듣다가 졸리면 그냥 자야지 하는 건방진 마음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던져 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은 그 미스터치에도 불구하고 듣다가 얼마나 감탄사를 내뱉었는지 모른다. 몇몇 음원을 들은 뒤로 난 알라딘에 소콜로프의 음반 품절이 풀릴 때마다 하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런 막귀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게 만든 사람인데 오죽하겠냐. 오랜만에 고클에 갔더니 거긴 소콜로프가 거의 왕좌에 등극해 있는 상태였다. 뭐랄까 완성형 테란/저그/프로토스를 찾았다는 분위기. 거의 ‘치트 수준의 연주’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사실 난 고클을 잘 가지 않는다. 일전의 폴리니의 쇼팽 《녹턴》 앨범 논쟁에 너무 상처를 받아 그 이후로는 필요한 걸 찾을 때 아니면 정말정말 어지간해서는 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무식해서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기도 하고. 그러다 오늘 뭣 때문(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에 갔다가 정말 울적해져서 종일 일도 못하고 우울해 있었다.

소콜로프의 놀라운 연주의 비교 대상은 폴리니가 많았다. 뭐 검색을 폴리니로 놓고 해서도 그렇겠지만. 소콜로프는 폴리니의 기념비적인 음반들 중 프로코피에프라든가 스트라빈스키, 쇼팽을 라이브로 연주했다. 이 세 작곡가의 곡은 폴리니의 음반을 정말 좋은 연주로 치는데 이제 소콜로프의 음원을 이야기하면서 폴리니가 얼마나 부족한지가 거론된다. 심란한 마음을 해결해 보고자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마음만 더 우울해졌다.

이미 알고 있다. 젊은 시절의 폴리니와 지금의 폴리니가 얼마나 다른지. 다만 난 그때의 연주도 지금의 연주도 좋다. 미안하지만 내 막귀로는 연주 스타일이 다를지언정 폴리니의 《전주곡》과 소콜로프의 《전주곡》이 모두 좋고, 소콜로프가 보여 주는 서정성에도 불구하고 4번 〈라르고〉의 폴리니의 연주가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샹송, 미안;). 난 폴리니의 라이브도 스튜디오 녹음도 좋아한다. 팬이라고 무조건 다 좋다는 편은 아니지만, 폴리니의 연주를 들으면 그가 음악 같다. 난 그것을 사랑한다.

2.
내가 바담 풍 해도 넌 바람 풍 하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가 열중하는 어떤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때문에 싸움이 나거나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를 보면서 꼭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나잖아. 그 ‘어떤 것’이 이상해진다고 나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해야지, 내가 다 옳은 건 아니지.

하지만 결국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폴리니의 《녹턴》 논쟁에서 상처를 받았던 건, 순식간에 폄하된 폴리니 때문이 아닌가. 그는 나이를 먹어도 연륜이 우러나는 연주를 못한다든지, 그저 테크니션에 불과했고 그거 하나 볼 만했는데 이젠 그나마도 별것 아니더라 하는 평가에 분개했던 게 아닌가. 더구나 무식해서 거기에 대해 반박할 수 없는 내 무력감(농담 아니고 정말 이럴 때는 피아노 학원 안 보내 주신 부모님 원망한다. 기억도 안 나지만 어릴 때 독학으로 바이엘 떼었다던데 좀 보내 주시지 그랬냐 싶어지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백날 잘난 척해 봐야 나도 옆으로 기는 게인 주제에 다른 게더러 앞으로 가라고 하는 수준인 거다. 좀 더 열리고 공정하고 착하려고 해 봐야 모두 강박일 뿐, 난 폐쇄적이고 편협하고 성질 더러운 인간일 따름이다. 여전히 난 내가 옳다고 말해 주고, 내 칭찬을 해 주는 사람이 좋은 유아다. 물론 그런 말을 듣기 좋아하지만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덜 자란 어른이기도 하다.

늘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을지. 정말 이건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참 쉽지 않다. 갑자기 잘 듣던 소콜로프 막 미워지고, 오기로 다시 듣다가 결국 폴리니도 프랑소와도 소콜로프도 내던지고, 존 메이어를 듣기 시작한다. 아, 간만에 들으니 정말 좋구나, 존. 고맙다.
2008/07/17 02:10 2008/07/17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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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루릴 2008/07/18 16: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제대로 된 어른 ---> 이게 내가 받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어요. 얼마전 말하기 시간에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을 대라는데 그냥 이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진거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기 힘든 것이라고 대답했죠. 정말 힘들겠지만 끝내 이룰 수 없겠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다가갈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늘 나의 대답에 신기해하는 울 선생 그날도 약간의 갸우뚱 후에 그냥 잔잔하게 웃더라구요.

  2. 황준식 2008/07/19 15:5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능력도 안되는데 한번에 두 개씩 하려니 어렵지. 어른은 포기하고 제대로만 되던가 제대로는 포기하고 어른부터 되던가.

    • JIYO 2008/07/19 16:23  address  modify │ delete

      일단 '어른' 쪽은 먹고 들어가는 게 있잖아. 나이. 지금 이 나이를 누가 애라고 보겠냐. 네 뜻대로 결벽하게 정의하자면 '제대로 된 인간' 정도겠는데, 그러면 너 나 짐승이라고 먼저 인간이 되라고 할 거잖아.
      뭐. 이나저나. 네 말은 완벽한 트집이다.
      어째 넌 그리 매를 버냐.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