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가는 길에 있는 역 동서 지하상가를 잇는 통로의 한쪽 벽에는 옷가게가 죽 늘어서 있다. 그 앞을 지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사든 사지 않든 옷가게들이 전시한 옷에 눈을 떼지 못한 상태로 길을 걷는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대충 몇 년은 된 듯한데, 옷에서 티가 대세다. 셔츠나 블라우스가 아니라 티셔츠. 대체로 티는 가벼운 옷차림에 어울리는 상의로 분류되었고, 조금 신경 써야 하는 자리에는 입고 가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인식되었다.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티보다는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어 주는 것이 기본으로 여겨지기도 했고. (여튼 내 기억에.)

지난해였나 친구가 쇼핑백 가득 옷을 가지고 와서 나와 다른 친구 앞에 풀어 놓으면서, 잘 입지 않는 옷이지만 버리기에는 아까운 옷이니 마음에 들면 골라 가지라고 했다(친구 셋 체구가 비슷비슷하다.). 다른 친구와 둘이 상의를 해서 반으로 나눴는데, 셔츠와 블라우스 종류가 많았다. 귀찮아서 못 입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내 옷 중에도 셔츠가 몇 벌 있지만 근간에 입은 적은 거의 없다(기억력이 영 나빠져서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다;). 여름에 에어컨에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는 오래된 셔츠를 빼면 꺼내 입지 않는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결국 다림질이 귀찮아서. -_-; 회사라도 다니면 그나마 낫겠지만, 집에서 일하면서 어쩌다 한 번 하는 외출을 위해 셔츠나 블라우스를 다리자니 무지 귀찮다. 그리고 입었을 때 좀 불편하기도 하고.

하여 이번 옷장 서랍에 든 여름옷은 90퍼센트 이상이 티다. 민소매부터 긴 팔까지. 내가 가서 구경만 하는 쇼핑몰도 티가 많다. 이런 분위기는 저 위의 유명 디자이너들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마크 제이콥스나 마르니, 끌로에, 필립 림 등 여러 디자이너들이 여러 가지 아이디어로 모양을 낸 티를 보여 주고 있다. 그 비율은 블라우스에 못지않다. 다양한 티로 유명한 유니클로의 사이트에 가 보면, 얼마나 티의 종류가 많고 예쁜지 다 갖고 싶을 정도다.

티의 길이와 디자인이 자유로워지면서 값싸고 캐주얼한 의상이라는 느낌이 많이 옅어진 듯하기도 하다. 예컨대 잘 빠진 긴 티를 입고 긴 치마나 H라인의 치마, 혹은 선을 잘 살린 청바지나 면바지로 받친 다음, 마법의 도구인 허리띠를 하고 적당한 장신구를 더하면 어지간한 자리에 빠지지 않는다. 레이어드룩을 응용해서 펜던트가 있는 목걸이와 진주 목걸이를 겹친다면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은 정장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아니 뭐 이모저모 귀찮으신 과감한 분은 튜브탑에 여름 재킷 하나면 만사 오케이지 않나? 난 못 입지만.

더구나 점점 옷에 대한 고정관념이 옅어지고 있는 편이라 티는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고, 응용하기에 따라서는 언제 어디서든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옷이 됐다. 심지어 블라우스나 셔츠보다 싸다. 잘만 말리면 다림질 안 해도 되고, 설사 다림질이 필요하더라도 그냥 쓱쓱 다리미만 밀면 되는 티. 셔츠 다릴 때마다 형편없는 내 다림질 실력을 한탄했던 시절은 이제 안녕이다.

그 지하상가 통로에서 파는 티들을 보면 정말 눈이 팽팽 돌아간다. 싸고 아이디어가 발랄한 티들이 어찌나 많은지, 단돈 5,000원이면 여름을 날 수 있는 티가 즐비하다. 티들을 보면 머릿속에서 코디가 파파팍 지나간다. 게을러서 가게 앞까지 다가가 천을 만져 보거나 하지는 않지만(그래서 결국 못 사지만;),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예뻐서 눈요기는 충분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처자들의 모습만 봐도 다들 예뻐서 뿌듯하다. 다만 사람 눈이 또 거기서 거기라, 그렇게 다양하고 반짝거리는 티들이 많은데도 비슷한 티를 입고 다니는 경우를 보면 안타까울 뿐(컬러풀한 영문이 네댓 줄로 쓰인 티는 좀 사양하자. 난 새로운 걸 보고 싶어.).

올해도 예쁜 티 많다. 유니클로 텔레비전 광고 보고 있으면 당장 인터넷으로든 오프라인 매장으로든 달려가야 할 것 같다. 갭도 티 예쁘지. 젊은 처자들이 발랄하게 티에 이것저것 받쳐 입고 걷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다. 아주머니들도 연세 드신 분들도 여름에 티와 치마로 간단한 차림을 하신 걸 보면 상큼하고. 남자들이야 말해 뭐 하리. 면바지에 깔끔하게 색 맞춘 티 하나 입어 주시면 참 좋다(그런데 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 정말 우리나라 남자들은 옷 못 입는다. 뭘 믿고? 가끔 곱게 차린 아가씨의 손을 잡고 가는 남자가 뭐라 말할 수 없는 옷차림일 때는 미칠 거 같다. 뭐 자기들만 좋다면 누가 말리랴만, 너무한 건 사실이지.).

오늘도 쇼핑몰에서 예쁜 티 보고 이제 티는 그만 사고 이미 산 티나 잘 입고 다니기나 하자며 구매 의욕을 누르는 이 한심한 인간. 그래서 그냥 이런 헛소리나 주절주절. 그나저나 서랍에 티가 구겨지지 않게 잘 수납하는 법 아는 사람 있으면 좀 알려 주셈. 이렇게 뒤적 저렇게 뒤적 하고 나서 먼 훗날 꺼내 보면 왕창 구겨져 있는 내 불쌍한 티들. 다리기는 또 귀찮단 말이지. 스팀다리미 사기도 귀찮단 말이지(이건 내가 실크에 도전하는 날 사리.).
2008/06/28 23:59 2008/06/2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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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덧말제이 2008/07/02 19:2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연세 드신 분들도 티 많이 입으시더라구요. 캐주얼하게
    요새는 셔츠나 블라우스 입으면 오히려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느낌이예요.
    물론 전 다림질이 귀찮아서... ^^;

    • 之窈 2008/07/05 13:45  address  modify │ delete

      그쵸? 연세 드신 분들이 티셔츠에 면바지 입은 모습 보면 참 좋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입는 거 어려워하셨잖아요. 보기 좋아요.
      으흐, 저도 다림질 귀찮아서 티 좋아하는데, 옷장 뒤집으면 자꾸 구겨져서 고민이에요. 티 잘 접어 잘 수납하는 법 좀 배웠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