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방에서 뭉그적거리면서 아직 뒷부분이 남은 소설책도 방치하고 여기저기 웹서핑과 지뢰 찾기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원래는 샤워하고 맥주를 마시며 소설책을 끝낼 요량이었건만, 모처럼의 휴식이 주는 이 ‘쓸데없는 게으름’이란. 일단 씻자 싶어 의자에서 일어나 책장 앞으로 갔다(이해 불능. 도대체 씻으러 가는데 왜 책장으로 가냐. 방향도 반대다. -_-;). 주저앉아 아주 늦게야 구입한 《Q.E.D》 29권을 읽었다.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가토 모토히로의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해도 첫 권이 나왔을 때에 비하면 이야기를 만지는 데 여유가 보인다. 연출도 좋아졌고. 다소 빡빡했고 거칠었지만 난 《로켓맨》을 꽤 좋아한다.
어느 날 문득 요시나가 후미의 《제라르와 자크》가 보고 싶어져서 하드를 뒤졌더니 없었다(책으로는 한양문고에 가기 전에는 구하기 힘들지 싶다.). 시디로 구워서 저쪽 책장 어딘가로 방치시킨 사실이 기억나 책장 쪽으로 가서 요시나가 후미의 다른 책을 집어 읽었다. 얼마 전에 이삭 언니한테도 불타올라 외쳤지만(그리고 이삭 언니는 그냥 조용히 포기하고 살라고 하셨지만),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참 이야기를 잘 다룬다는 감탄이 나온다. 폭넓은 지식과 깊은 통찰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대중성까지. 앞의 두 가지를 가지면 뒤의 한 가지를 갖기가 어렵기 마련인데, 이 사람에게는 경박함조차 아무렇지 않아하는 배짱이 있다.
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을 질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말과 글’에서 더욱 강렬한 것 같다. 난 언제나 내 부족한 언어 실력과 얕은 통찰력과 천박한 지식을 괴로워해 왔으니까.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말로 글로 표현해 낼 줄 아는 능력은,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경이롭다.
언젠가 C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데 이 친구가 보여 주는 광범한 지식에 감탄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를 해 온 그 친구의 끈기와 성실함이었다.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 인간이니 그 모든 것은 기꺼움에서 나온 결과이고, 그걸 생각하면 더 무서운데 여튼 본인은 아직도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쳐서 나(와 내 이 호소를 듣고 같이 치를 떨던 준식이)를 절망하게 했다(그러나 사실은 준식이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D가 날 감탄하게 하는데, 그는 재미고 뭐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한다.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 관련서 읽기라든가 공부라든가 뭐든 척척 해낸다. 그가 설정한 당위성이 그를 움직인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기에 수반돼야 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것들을 호오 가리지 않고 죽죽 척척. 재미없으면 듣던 강의도 중간에 나와 버리는 나 같은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럽고 뭐고, 질투조차 불가능한 캐릭터라고나 할까. 그저 놀랍고 감탄스럽다.
요새 했던 일은 거의 저주의 원고였다(원서 문장 어렵고, 내용도 어렵고, 번역도 어렵고, 고생은 죽어라 하지만 결과물은 형편없고, 자책감과 자괴감에 눈물이 나도록 괴로워했고, 시간은 엄청 썼으나 돈도 벌지 못한 원고라는 점에서.). 같은 저자의 번역 원고 두 권을 진행하면서 정말 땅속 깊은 곳에 파묻히고 싶은 심정으로 한동안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계속 애정이 늘어서 감탄도 하고 감동도 하며 원서를 읽곤 했다. 이 두 번째 책에서 저자는 책의 끄트머리에 그가 공부해 온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신체의 장애나 주변 상황의 어려움 등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공부한 학자의 글은 참으로 진실해서 감동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만화책을 보다 보면 작가가 발전하는 게 보일 때가 있다. 화면 연출이든 이야기 구성이나 완급 조절 같은 것이 점점 더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 드는 때. 《Q.E.D.》도 가끔 그렇다. 오늘 29권을 보면서 하하 웃다가, 만화책을 스물아홉 권이나 그렸으니 이 정도 늘어 주긴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파다 보면 삽질 기술이라도 늘게 마련이다. 만화가는 만화가로서, 학자는 학자로서, 직업인은 직업인으로서, 작가는 작가로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있을 것이다. 뻔한 얘기지만, 난 늘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지낸 세월을 가리고 지금 내가 보는 결과만으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겠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이라고는 짧은 기간에 잡다한 것들을 해찰하는 ‘반짝반짝병’의 심화뿐이지만, 그것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언젠가 ‘해찰의 대가’가 된다거나 그중에서 뭔가를 찾아내거나 하게 될까?(뭐냐;) 아니 가만히 짚어 보니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성실’ 그 자체가 아닐까. 음. 그렇다면 평생 난 무엇으로든 일정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는 다 그른 것 같다. 질투는 자신에게 없는 걸 원하기 때문이라고 어디서 그러던걸. 그냥 이러고 살겠구나.
하지만 내 질투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은 계속 그렇게 나아가 주면 좋겠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내가 즐겁고, 그들이 있어서 그 질투의 힘으로 내가 ‘반짝’ 달리기도 하니까. 게으른 내게는 이런 인생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고.
첫 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가토 모토히로의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가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듯해도 첫 권이 나왔을 때에 비하면 이야기를 만지는 데 여유가 보인다. 연출도 좋아졌고. 다소 빡빡했고 거칠었지만 난 《로켓맨》을 꽤 좋아한다.
어느 날 문득 요시나가 후미의 《제라르와 자크》가 보고 싶어져서 하드를 뒤졌더니 없었다(책으로는 한양문고에 가기 전에는 구하기 힘들지 싶다.). 시디로 구워서 저쪽 책장 어딘가로 방치시킨 사실이 기억나 책장 쪽으로 가서 요시나가 후미의 다른 책을 집어 읽었다. 얼마 전에 이삭 언니한테도 불타올라 외쳤지만(그리고 이삭 언니는 그냥 조용히 포기하고 살라고 하셨지만),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참 이야기를 잘 다룬다는 감탄이 나온다. 폭넓은 지식과 깊은 통찰력과 이야기꾼으로서의 대중성까지. 앞의 두 가지를 가지면 뒤의 한 가지를 갖기가 어렵기 마련인데, 이 사람에게는 경박함조차 아무렇지 않아하는 배짱이 있다.
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줄 아는 사람을 질투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말과 글’에서 더욱 강렬한 것 같다. 난 언제나 내 부족한 언어 실력과 얕은 통찰력과 천박한 지식을 괴로워해 왔으니까.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어떤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말로 글로 표현해 낼 줄 아는 능력은,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경이롭다.
언젠가 C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데 이 친구가 보여 주는 광범한 지식에 감탄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내가 감탄한 것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를 해 온 그 친구의 끈기와 성실함이었다. 즐겁지 않으면 하지 않는 인간이니 그 모든 것은 기꺼움에서 나온 결과이고, 그걸 생각하면 더 무서운데 여튼 본인은 아직도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쳐서 나(와 내 이 호소를 듣고 같이 치를 떨던 준식이)를 절망하게 했다(그러나 사실은 준식이도 만만치 않다.).
요즘은 D가 날 감탄하게 하는데, 그는 재미고 뭐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한다.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 관련서 읽기라든가 공부라든가 뭐든 척척 해낸다. 그가 설정한 당위성이 그를 움직인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기에 수반돼야 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것들을 호오 가리지 않고 죽죽 척척. 재미없으면 듣던 강의도 중간에 나와 버리는 나 같은 인간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럽고 뭐고, 질투조차 불가능한 캐릭터라고나 할까. 그저 놀랍고 감탄스럽다.
요새 했던 일은 거의 저주의 원고였다(원서 문장 어렵고, 내용도 어렵고, 번역도 어렵고, 고생은 죽어라 하지만 결과물은 형편없고, 자책감과 자괴감에 눈물이 나도록 괴로워했고, 시간은 엄청 썼으나 돈도 벌지 못한 원고라는 점에서.). 같은 저자의 번역 원고 두 권을 진행하면서 정말 땅속 깊은 곳에 파묻히고 싶은 심정으로 한동안 몹시 괴로워했다. 하지만 저자에게는 계속 애정이 늘어서 감탄도 하고 감동도 하며 원서를 읽곤 했다. 이 두 번째 책에서 저자는 책의 끄트머리에 그가 공부해 온 과정을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신체의 장애나 주변 상황의 어려움 등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공부한 학자의 글은 참으로 진실해서 감동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표현했다.
만화책을 보다 보면 작가가 발전하는 게 보일 때가 있다. 화면 연출이든 이야기 구성이나 완급 조절 같은 것이 점점 더 착착 달라붙는 느낌이 드는 때. 《Q.E.D.》도 가끔 그렇다. 오늘 29권을 보면서 하하 웃다가, 만화책을 스물아홉 권이나 그렸으니 이 정도 늘어 주긴 해야겠구나 생각했다. 한 우물을 오랫동안 파다 보면 삽질 기술이라도 늘게 마련이다. 만화가는 만화가로서, 학자는 학자로서, 직업인은 직업인으로서, 작가는 작가로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하다 보면 어떤 경지에 이를 수는 있을 것이다. 뻔한 얘기지만, 난 늘 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지낸 세월을 가리고 지금 내가 보는 결과만으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겠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이라고는 짧은 기간에 잡다한 것들을 해찰하는 ‘반짝반짝병’의 심화뿐이지만, 그것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언젠가 ‘해찰의 대가’가 된다거나 그중에서 뭔가를 찾아내거나 하게 될까?(뭐냐;) 아니 가만히 짚어 보니 내가 질투하는 대상은 ‘성실’ 그 자체가 아닐까. 음. 그렇다면 평생 난 무엇으로든 일정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는 다 그른 것 같다. 질투는 자신에게 없는 걸 원하기 때문이라고 어디서 그러던걸. 그냥 이러고 살겠구나.
하지만 내 질투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은 계속 그렇게 나아가 주면 좋겠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내가 즐겁고, 그들이 있어서 그 질투의 힘으로 내가 ‘반짝’ 달리기도 하니까. 게으른 내게는 이런 인생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고.
2008/06/26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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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나가님은, 아무래도 좀 짱인 듯. 타고났어요 그 사람은. 천재를 부러워해봤자 찌질해질 뿐이죠.^^; 솔직히 우리가 하는 일도 이런저런 난 놈들 뒤치다꺼리 해주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일일이 그들의 재능을 질투하고 괴로워하면 제명에 못 살아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인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야죠(라고는 하면서도 매일 괴로워하고 있음).
요시나가는 전체를 조망하는 눈이 있는데, 역사광으로서의 관심이 그 눈을 더 강하게 해 준 것이 아닌가 혼자 분석해 봤습니다. 뭐 천재라도 그런 부분은 좀 덜 부럽고요(부러운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더 부러워요. '사람'을 아는 거잖아요.
글 잘 쓰시면서 다른 사람 부럽다시면... ^^;
하하하;;; 고맙습니다.
이것밖에는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