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사도 잘 다니지 않으니 포장이사도 처음.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오시더니 잰 손길로 짐을 싸신다. 살 때도 느끼지만 이사할 때는 정말 집안 살림은 주부가 관장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아버지는 ‘왼손은 거들 뿐’이란 말처럼 ‘오른손’인 어머니의 지휘 아래에서 한두 마디 힘 있는 말씀이나 행동을 해 주시는 정도고, 실제적인 총지휘는 어머니가 하시더라.

운전도 하고 짐도 나를 수 있는 동생과 달리 이런 일에서는 완전 무용지물인 난 싸늘한 날씨에 오들오들 떨다가 결국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주차장의 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쁘게 움직이는 분들은 덥지 않아 좋다셨지만 꼼짝 않고 자동차 좌석에 기대고 있던 난 동생의 점퍼까지 빌려 입고도 바들바들 떨었다. 울적. 그러더니 결국 내 짐의 핵심인 책장이 비 때문에 다음 날 온다는 통보.

새 집으로 짐을 옮기고 나니 빗줄기가 굵어진다. 짐을 부리는 데만도 온 하루가 걸리더라. 마지막이 내 방이었다. 그 팀의 장인 듯한 아저씨가 마지막 상자를 놓으면서 이 방 짐이 제일 장난 아니었다고 한마디 하시며 웃는다. 아아, 저도 알아요. 책 짐이 제일 무거운데 다른 짐도 많았으니 정말 블랙홀처럼 느껴지셨겠죠. 저도 실은 내내 미안했어요. 마음을 담아 웃는다. 책장이 오지 않으니 그냥 상자의 물건들을 쌓고만 가시라 했더니 책장 오면 정리하고 전화 달라고 하시며 가셨다. 하마터면 다시 한 번 방 한가운데 산처럼 쌓인 물건들을 보는 사태를 당할 뻔했다.

책장은 그러고도 다음 날 저녁 늦게야 왔다. 아침부터 코피를 쏟고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 의자까지 배송 누락되는 바람에 기분은 바닥을 쳤다. 그러나 막상 저녁 늦게 배송 온 아저씨의 고된 모습을 보니 뭐라 하기도 어렵더라. 전날 침대 배송 아저씨도 그러시더니. 그래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전날 집에서 가져온 책장에는 만화책을 꽂았다. 책장 세 개의 예상 구성은 각각 하나씩 만화책, 일반 단행본, 참고서. 만화책은 크기도 고만고만하고 책등 색깔도 고와서 좍 꽂고 나니 심히 보기가 좋았다. 아 뿌듯(아 지금 보니 아무래도 《음양사》 두 권이 실종된 듯한 느낌이;;;). 물론 두 줄로 넣긴 했지만 뭐 몇몇 책들은 다 읽고 나면 질째로 버릴 거니까 곧 괜찮아지리라 믿는다. 읽지도 않은 14권을 포함한 《파사드》 열네 권을 통째로 버린 실력이다. ㅠ.ㅠV

물론 일반 단행본은 달랐다. 처음 몇 상자는 척척 집어넣었는데 슬슬 속도가 떨어졌다. 결국 끝에서 두 번째 상자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세계 종교사상사》를 발견하고 식겁한 뒤로 슬쩍 방치하고 도주, 다른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책장의 빈자리에 되는 대로 남은 책들을 박아 넣고 혼자 ‘다했다!’ 하며 박수를 쳤다. 아 몰라. 더는 못해.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하다구. 책장 두 개에 어쨌든 다 때려 넣었잖아. 사실 정리정돈의 가장 높은 벽은 잡동사니 같다. 쓰일 곳은 있으나 둘 곳은 마땅치 않은.

내 방은 테트리스 같다. 처음에 아버지가 머리를 동쪽이나 남쪽에 두라고 하셔서 도저히 침대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궁리해서 만든 방 구조는 이상하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부터 친척 언니, 이웃집 부부까지 본 사람들마다 이상하다고 한마디씩 한다. 급기야 아버지마저 뒤통수를 치시며 침대 머리를 바꾸자고 하셨다. 베란다로 내놓은 책장들을 안으로 들이라는 충고도 받았다. 하지만 싫어. 베란다는 이제 내 또 다른 작은 방이니까. 베란다 구석 벽 두 곳에 책장을 넣고 그 옆에 눕힌 책장에 음반과 소소한 추억거리를 놓았다. 바닥에는 요가 매트를 깔았다. 작은 화분 몇 개만 눕힌 책장에 얹으면 이제 거긴 내 기지가 되는 거지. 매트 위에서 뒹굴거리면서 책을 꺼내 보고 음악을 듣고 낮잠을 잘 거다. 그걸 위한 작은 담요도 있닷!

게다가 테트리스처럼 이상한 방 구조 덕분에 한 구석에 은밀하게 《은혼》 달력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단 말이지. 음홧홧홧홧! 보이는 데다 붙였다가 어머니의 눈물 어린 호소에 떼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번의 자리는 집 구경 온 외부인은 절대 볼 수 없는 자리다. 너무 좋아. 5월은 반이나 넘어갔지만 그래도 신센구미 구인 광고를 떡 붙여 놓고 혼자 히죽거린다. 좋아좋아.

어제 이사 기념 고기 구워 먹기를 하면서 식구들끼리 아직도 이사가 실감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어제와 오늘 운동하러 나오면서 보는 풍경은 너무도 다르고, 창밖을 보이는 경치나 느낌이 몹시 달라서 마치 가족 여행을 온 착각이 든다. 이제 15분쯤 걸으면 도서관(훗훗훗, 이 집을 나갈 때까지 내 책장으로 삼아 주마!!! 나 대신 책을 사서 보관해 두어랏!)인데도 아직도 먼 느낌이 든다. 샤워기 사용부터 현관문 여닫는 문제까지 배울 것도 많다. 노트북을 위해 이 불안정한 무선 인터넷도 손봐야 한다. 아 어리바리. 그래도 뭐 기분 좋은 적응이 되길 바랄 따름.

그 와중에 저우싱츠의 《서유기》도 우연찮게 봤고, 《블리치》도 본방 사수했으며, 어쩌다가 《초속 5센티미터》까지 봐 버렸다. 뭔가 대단한 기분(혹은 미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릉수목원 후기와 몇 가지 수다는 곧, 천천히.
2008/05/17 01:54 2008/05/17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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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루릴 2008/05/18 01:0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고생했어요. 근데 침대랑 바꿨나봐요. 도서관도 가깝고 의정부예당도 가깝고 좋네요.
    가글 가주 해요. 새집 증후군도 있으니까. 한동안 코 훌쩍대지 말고. (난 잔소리 하는게 좋아요)

    • 之窈 2008/05/18 19:38  address  modify │ delete

      전의 침대는 2인용이었으니까 싱글로 하나 샀지. 자리만 차지하잖아.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가글 중인데 여전히 코피가 좀 난다. 코가 자주 막혀서 숨쉬기도 좀 힘들고.
      뭐 걱정해서 하는 잔소리인 거 알아. ^^

  2. boreas 2008/05/19 17:4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술 마시자....

  3. N. 2008/05/19 20:5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드뎌 이사하셨구려, 언니 :) 혼자만의 기지 생긴 거 축하해요. ^^

  4. lunamoth 2008/05/20 23:2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15분쯤 걸으면 도서관" 부러운걸요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