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베란다의 환한 달빛을 보다가 보름인가 했다. 정말이지 둥근 달은 대단하기도 하다. 빛도 모양도 언제나 같지 않고, 뜨는 시간도 달라서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불러온다. 뒤늦게 달을 사랑하게 된 사람으로서, 평생을 담담하게 오래도록 달을 좋아할 수 있겠구나 기쁘다.

아소우 미코토의 《벨》 2권에 보면, "달과 바다의 빛만으로 책도 읽을 수 있겠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뭐 대단한 무엇이 들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사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남자의 뒷모습과 그 앞에 보이는 베란다, 다시 그 앞의 바다와 달빛. 그런 곳 어딘가 한구석에 앉아 바다에서 들려주는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는다면 멋진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그 대사는 내게 매력적이다.

책으로는 시집이 좋으려나. 그런 곳에서야 무슨 책이든 좋겠다. 하지만 가끔 달을 노래하거나 달을 소재로 쓴 시를 보고 있으면 '달 특집!' 책을 하나 만들고 싶어진다. 달이 든 단편소설, 달이 든 시, 달이 든 만화, 달이 든 그림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 달에게 헌정하는 거지. 아 그치만 후보가 무척 많겠다. 선별도 쉽지 않겠는걸(그러고 보니 팔리지도 않겠구나. -_-;;;).

서양에서는 마술과 마법이 가득한 시공간이지만, 동양에서는 사색과 그리움의 시공간이 달이 있는 공간이다. 밤은 달과 뭇별이 있어서 더욱 아름답다. 안 그래도 생각 많고 어지러운데 세상의 소리도 잦아들어 한적한 시간에 집중하기 좋게 어둡기까지 하고, 거기에 달까지 휘영청 떠서 아련한 달그림자를 만들어 주면 이건 완전 펴 놓은 돗자리다.

海上生明月, 天涯共此時. 바다 위로 달이 뜨니 하늘 끝의 그대 이 시간을 함께하리.
情人怨遙夜, 竟夕起相思. 정 깊은 이는 긴 밤을 원망하며 온 밤을 그리움으로 보내네.
滅燭憐光滿, 披衣覺露滋. 촛불 끄니 가득한 달빛 사랑스러워, 옷 입고 나가니 이슬이 느껴지누나.
不堪盈手贈, 還寢夢佳期. 달빛 가득한 손을 그대에게 드릴 수 없으니 다시 침실로 돌아가 꿈에서 만나리.

심심해서 뒤적인 시집에 덜컥 장구령張九齡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읽어도 사랑시인데, 내가 쥔 시집의 주제는 우정이다. 그래, 뭐 보고 싶고 그리운 친구가 없겠냐. 이놈의 머릿속은 BL에 물들어 이제 건전한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건가. 나 역시도 달빛을 보며 친구를 그리워한 적이 있지 않느냐 말이지.

‘하늘 끝의 그대 이 시간을 함께하리天涯共此時’라는 이 정서는 중국 옛 시에서 참 자주 나타난다. 달은 지구 어디에서나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별은 북반구에서는 보이지만, 남반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달은 그렇지 않다. 달은 늘 있다. 뭐 내가 달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는 대낮일 수 있지만.
읽을 때마다 명작이야 하며 감동하는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調歌頭〉도 있다.

*앞 싹둑*
人有悲歡離合, 月有陰晴圓缺, 此事古難全.
사람에겐 슬픔과 기쁨,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달에게는 어두움과 밝음, 보름과 그믐이 있어, 이 일은 예부터 완전하기가 어려웠나니.
但願人長久, 千里共嬋娟.
다만 그대가 오래도록 살아 천 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 저 달을 감상할 수 있기를.

이 사詞는 덩리쥔鄧麗君과 왕페이王菲가 노래로 멋지게 부르기도 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이 사를 따라 부르면서 드는 느낌이 달라진다. 가끔은 소동파가 너무 과찬을 받는 건 아닌지 마음이 꼬일 때가 있기도 하고, 억센 인간이라 얽힌 여자들 인생이 참 기구했다 싶기도 하지만, 말할 수 없는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작품을 읽노라면 왠지 기분이 묘하다.

처음에는 그저 잘 지은 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갈수록 읊는 내 마음과 그의 마음과 세월이 얽힌다. 지금은 한 번 중얼, 노래하고 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사 속에 소동파의 마음 조각이 들어 있고, 거기에 다시 내 마음이 얹힌다.

참 긴 세월 동안 달은 많은 이의 마음과 한숨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싸가지 없이 달에 뭔 생각이 있냐, 분화구투성이의 별이라고 해도, 사람이 마음을 의지하는 힘은 강력하다. 달에 아무것도 없고, 달이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달은 달이다. 달이 햇빛을 받아 우리에게 보내는 그 빛에 우리는 갖은 상념과 마음을 싣는다.

두고 가는 풍경이 너무나도 아쉽고, 바뀔 내 방의 창밖 풍경이 날 우울하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달이 내 방 베란다를 비출 걸 상상하면 위로가 된다. 베란다에 누워 달빛 속에서 헤엄을 쳐야지.
2008/04/21 02:15 2008/04/21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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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나방 2008/04/22 01:0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시구가 하나하나 좋네요. 오늘 누군가 낮달이란 말을 꺼낸듯 싶은데, 참 생경하면서도 그럴싸하더군요... 허허

    • 之窈 2008/04/22 01:41  address  modify │ delete

      아니 갑자기 웬 '달나방'? 뭔 일이다요?

      근데요, '낮달'이란 말이 생경하다는 말씀이 전 더 생경한데요. 설마 처음 들으신 건 아니죠?

      한시 좋은 거 많죠. 제가 몰라서 그렇지. 가끔 한 수씩 올리고 싶은데 요샌 워낙 시도 안 읽고 해서. 좀 읽으면 다시 올리고 싶긴 해요. 저 자신에게도 공부가 되고, 정감도 나누고 싶고.

  2. 소루 2008/04/25 23: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달 빠입니다ㅜㅜㅜ(붙여 말하면 다른 뜻이 되므로 주의;;;) 사람을 미치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달이 좋아요. 모양과 시간을 불문하고 달이 좋습니다.
    근데 저 장구령의 시는 아무리 봐도 그거;인데요. 달 보면서 친구 생각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만날 수 없으니 꿈에서 보겠다니 이건 촘...전 제가 건전하다고 언제나 믿고 있는데 이게 우정이라니 으....
    한시 좋아요. 가끔 올려주세용.

    • 之窈 2008/04/26 12:25  address  modify │ delete

      질문: '달빠'라고 하면 어떤 뜻이 되나요? (설마 수달빠는 아니죠? 소루 님은 스타를 알긴 해도 보지는 않으시는 듯한데...)

      실은 전 별 보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달 싫어했던 사람이랍니다. 좋아하기 시작한 건 아직 10년 안 돼요.

      뭐 장구령 시를 떠나서,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습니다. 소루 님, 상식적인 선에서 소루 님은 전혀 절대 조금도 건전하지 않으세요. 1%도. 어림없어요. 호호.

    • 소루 2008/04/27 12:55  address  modify │ delete

      ....1%.
      지요님 저 좀 상처받았어요...? 훗훗훗.
      달/빠는 제 입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창대한 개념이라
      달/빠로 네입어에서 검색해서 나온 '달/빠가 대체 뭐냐'는 수많은 지식인 질문 중 하나를 링크하겠습니다;;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3&dir_id=305&eid=8EajwstGUiWPMrBmUQGEm/E58tQdNrhO&qb=tN66/A==&pid=ftn3KdoQsDNssuoPyLosss--464627&sid=SBPgOWy0E0gAADA3Js0

      한 마디로 덕후 용어이고, 그 자체보다는 이 현상이 전체적인 국내 오덕계에 미친 파급 효과의 측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개념이라 하겠습니다...눼....

    • 之窈 2008/04/27 20:04  address  modify │ delete

      상처 안 받으시는 거 다 압니다. 쿨한 아이돌이 이런 데서 상처 받으시면 곤란해요. 훗V

      달 빠가 뭔 소린지 이제 알았습니다. 걔들이었군요. 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지만 용어를 만들 정도로 많단 말인가요? 아니 어쩌면 용어를 만들 정도로 난리를 쳤을 수도 있겠군요.
      (그나저나 달 빠란 소리에 대뜸 수/달/빠를 연상한 전 역시나... 그리고 우리는 역시나...;)

      대표작을 전혀 읽지 않고 얘기만 들어서 더 이상은 언급이 불가능하네요. 재미는 있나요, 덕후 님?

    • 소루 2008/04/28 23:17  address  modify │ delete

      쪽수는 얼마 안되는데 애들이 포스가 있어서 그렇죠-ㅁ- 게임은 걍 그런 종류의 게임 중에선 적당히 재밌어요. 감히 절 낚을 정도는 아니지만 섬세한 중2병 환자들에겐 먹힐 수도 있겠죠 뭐.....(전 철든 척)

      그래도 우리 덕후라서 인생이 즐겁잖아요:$ 우후후.

    • 之窈 2008/04/29 00:04  address  modify │ delete

      게임은 애당초 해 볼 생각도 없어요. -_-;
      그거 소설로 만든 건 어떤지는 좀 궁금하고요.

      그나저나 핵심은 이건데,
      저 덕후 아니거든요? ^^+

    • 소루 2008/04/29 01:08  address  modify │ delete

      아니 뭘 따지세요 솔까말 일년동안 똑같은 가수 음악 듣고 있으면 그게 덕후지 뭐예요? 장르 좀 다르다고 그렇게 나오시다니 이런 배신감...그냥 도쿄지헨 덕후 폴리니 덕후 하시란 말이예요-_- 흥칫핏.

      아 그리고 성우 팬은 원래 덕후예요. 반론은 접수받지 않습니다ㄲㄲㄲ

    • 之窈 2008/04/29 02:30  address  modify │ delete

      아니 이건 뭐 반론을 할 수가 없는... 쿨럭.
      님하, GG요. ㅠ.ㅠb

      근데 저기요...(작은 목소리로 소심하게;) 목소리 좋아하는 데도 덕후 소리 들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