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이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프로젝트'는 끝났다. 갈수록 자는 시간도 늦어지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시간도 늦어진다. 눈뜨면 대낮이고 일 좀 하다가 아점을 먹고 웹사이트를 체크한다. 몸이 찌뿌듯해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문득 베란다에 선다. 햇살. 갑자기 세상이 새로워진다. 해를 많이 못 보면 무기력하고 우울해진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째 날씨 무지 따뜻하다? 봄이냐 여름이냐. 친구랑 채팅을 하다가 윤중로의 벚꽃이 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굳는다. 벚꽃이 언제 폈는데? 아니 목련 꽃봉오리만 본 기억이 나는 거 같단 말야. 아아, 나도 봄나들이 하고 싶어. 아버지께서 끓여 둔 영지차를 마시며, 출판사로 전화한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종알종알 의논을 마치고 다시 일을 하려는데 전화가 온다. 시간 괜찮으시면 원고 하나만 해 주세요. 급한 원고구나. 번역도 안 들어온 원고를 이달까지 마치라는 미션임파서블 계획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도 하지만, 오래 알던 사람이 일부러 부탁하는 건데 거절하기는 뭐 하고, 원고를 일단 보자고 한다. 번역은 좋다. 원서를 보내 달라고 메일을 보내고 다시 일을 하려고 앉는다. 배경음악은 지헨의 싱글들. 아 그래, 히라마 미키오 앨범도 좋다던데. 검색. 유튜브에 한 곡 있다. 아 뮤직비디오는 보지 말걸. 노래는 좋은데 비디오 웃겨. 일부러 이러는 거야? 검색한 김에 어디 우키네 인디 노래 더 있나 볼까. 없구나. 그냥 있던 〈미러볼〉이나 한 번 더 듣자. 요즘 들르는 쇼핑몰에 싸고 예쁜 원피스가 하나 들어왔다. 일하려고 다시 마음을 잡는데 눈앞에서 아른아른. 아 돈 없는데 왜 이래. 투덜거리면서 들락날락. 내가 지금 몇 쪽이나 했지? 한 게 없구나. 훌쩍. 제발 집중 좀 해라. 어째 출출하군. 커피 물을 올리고 토스터에 식빵을 넣는다. 요샌 어째 계란이 당기네. 하나 먹자. 손에 식빵 가루가 묻으면 교정지도 컴퓨터도 만지기 어렵다. 마우스로 웹서핑이나. 어머니께서 짐 정리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신다. 잠시 모녀 수다 모드. 앗 일해야 하는데! 집중을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정말 열심히 일하려고 작정한다. 중얼중얼 문장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날아드는 선율.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음악이 공격한다. 날 죽여라. 문득 저녁을 먹어야 요가를 간단 생각이 든다. 저녁을 챙기며 시계를 보니 스타리그 하는 날이구나. 제동이 2패 탈락. 저 녀석은 가끔씩 왜 저러나 싶게 경기를 한다. 저녁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달이 곱다. 음악을 들으며 터덜터덜 걷는데 어디선가 휘청하는 향이 난다. 돌아보니 밤공기 속에 라일락이 서 있다. 아니 라일락은 대체 언제 핀 거야! 라일락 앞으로 달려가서 막 항의하다가 향기에 취해 돌아선다. 어째 비틀림이 더 심해진 거 같다, 너? 요가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이사 가면 반드시 듀오백 의자 살 거예욧!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아. 듀오백이라니깐! 오면서 《블리치》는 목요일, 금요일 10시인데 요가 마치고 오면 금요일은 반밖에 못 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금요일은 시간을 옮길까 하다가 주말에 죽어라 꼬박꼬박 재방송까지 챙겨 보면서 참 나도 징하구나 웃는다. 갑자기 솟구친 키스케에 대한 애정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키스케를 검색한다. 세상에, 《블리치》 인기 대단하구나. 전 세계 각종 언어로 이미지가 뜬다. 키스케도 인기 좋구나. 덕분에 사진 좀 건졌다. 그나저나 연재분을 꼬박꼬박 챙겨 보는 동생 놈이 키스케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의 근황을 알 도리가 없다. 20권까진가 보고 관뒀는데 새삼 애정이 넘쳐서 감당불능지경인지라 일하다 말고 앉아서 그 뒤를 찾는다. 지헨에서 벗어나고자 배경음악을 바꾼다. 파일상자에 《KISS》 때문에 찾았던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가 몇 개 들어 있다. 마사유키의 연주는 어떨지 궁금하다. 종소리라니. 윤디 리의 타건이 마음에 드는군. 어디. 윤디 리의 연주곡 몇 개를 찾아본다. 오, 쇼팽콩쿨 우승자였어? 그래서 소리가 이렇구나. 더 들어보자 싶어진다. 고클래식 가 보니 소콜로프 연주를 들어보란다. 훗. 소콜로프, 짐승. 이렇게 전방위로 자기 나름의 중심과 설득력을 갖는 인간은 흔치 않다. 전에 들었던 바흐 듣고는 설득당했고, 라흐 듣고는 감동 먹었지. 아니 그게 라이브라니. 잠깐, 일해야 하잖아. 그 와중에 《블리치》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키스케에게 열광하고, 그냥 나머지 다 봐야겠다 결심한다. 아 이 남자 정말 너무 멋지잖아. 자기도 자기가 섹시한지는 아는구나. 저 부분을 한 님이 대사 칠 걸 생각하면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음, 내가 지금 어디까지 일했더라? 오늘 목표량은 얼마였지? 이 와중에 이 긴 수다는 왜 쓰고 앉았어? 으이구. 자자.
2008/04/17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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