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샀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니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해 알고 '사서 볼까' 하고 잠시 생각했던 건 기억나지만 수입 원서를 판매처의 값을 대충 비교하고 결정해서 손에 쥐고 읽기까지의 과정이 꿈처럼 아련하다. 귀신에 홀린 걸까.

근간에 여성패션지를 조금이라도 들춰본 사람은 이 책의 존재를 알 것이고, 온스타일의 〈프로젝트런웨이〉를 본 사람은 저자의 이름을 알 것이다. 니나 가르시아는 미국판 《엘르》의 편집장이고, 지금 내가 말하는 이 책 《The little black book of Style》의 저자이다.

이 책의 핵심은 사실 앞에 다 있다(정확하게는 46쪽까지다.). 뒷부분은 동어반복 혹은 좀 더 구체적인 설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3장과 6장은 상호 작용을 일으킨 스타일과 문화의 이야기, 그리고 패션의 역사 정리다. 어떤 영화에서의 어떤 배우가 그 시대와 시대를 넘어 하나의 아이콘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간단하게 정리돼 있고, 1990년대에 마크 제이콥스와 톰 포드가 어떤 의미심장한 일을 패션계에 끌어왔는지 한 줄 요약돼 있다.

4장은 TPO에 맞춰서 옷을 입는 기본 법칙 설명인데 패션지 몇 달 보면 알 만한 내용이고, 패션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Insider tips and tricks〉란 5장을 채우고 있는데, 5장은 정말로 건너뛰었다. 나중에 읽으려고. 그리고 당장 요긴한 내용도 46쪽까지의 주장을 넘어서는 내용도 없어 보였으므로.
스타일과 관련해서, 온스타일의 외국 프로그램도 이 책도 한 목소리를 낸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하여 너 자신이 돼라. 스타일은 너를 세상에 말하는 방식이다. 즐겨라.

2.
그러니까 니나 가르시아가 패션지 편집장이어서 패션을 이야기할 뿐이지, 정확하게 범주는 패션만이 아니다. '스타일'은 나 자신을 정의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모든 나의 방식을 가리키게 된다. 다만 패션지 편집장인 그녀는 독자에게 좀 더 세련되고 보기 좋은 형태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는 차이가 있다.
잡지에 이미 소개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10가지 아이템'은 이 책의 핵심인 2장 〈기초들〉의 일부다.

2장 〈기초들〉의 첫 번째 기초는 '편집'이다. 봄/여름과 가을/겨울로 나뉘는 패션계에서 쏟아지는 아이템은 수도 없고, 편집장인 그녀는 그것들을 ‘편집’해서 잡지에 올린다. 온스타일의 〈스타일매거진〉을 진행했던 이승연도 3년 입지 않은 옷은 남을 주거나 벼룩에 내놓거나 버린다고 했다. 니나 가르시아도 같은 말을 한다. 많은 옷은 중요하지 않다. 적은 옷이라도 나답고 편하고 내게 영감을 준다면 그걸로 됐다(연예인들의 셀 수 없이 많은 옷들은 잊자.). 입지 않는 옷으로 옷장 채우고 한숨 쉬지 말고 과감하게 버려라.

좁은 내 방은 침대 옆에 등을 대고 허리를 뒤로 꺾어 기대면 거의 모든 책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사 가는 집의 내 방은 베란다를 튼 이 방보다 좁다. 내 집이 아니라서 거실 한 면을 책장으로 짜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버려야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왠지 용기탱천하여 다 버릴 수 있을 듯했다. 그래, 그냥 다 버려!

3.
그러나 벌떡 일어나는 그 짧은 사이, 그리고 책 앞에 선 몇 초 사이에 결심은 무너졌다. 기본서는 둬야 하지 않나. 《사기》나 《산해경》은 원문으로 읽느니 해석본이 있으면 편하잖아. 같은 맥락으로 가기 시작하니 어지간한 기본서는 내 검열대를 통과해 버렸다. 괜찮은 중국문학사 책이 국내서는 없으니 이 문장 예쁜 다섯 권 묶음은 그냥 두자. 젤라즈니와 반 다인, 개릿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버려. 사전을 버리는 무서운 짓은 할 수 없지. 옷도 마찬가지. 10년 넘게 잘 입었던 가을 코트를 손에서 쥐었다 놨다 반복한다. 사 놓고 단 한 번도 입지 못한 치마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이걸 버려, 말아?

어제 산 물건이라도 내 스타일이 아니면 버려야 하는 것이 '편집'이다. 패션만 편집하는 게 아니다. 지식의 정리정돈과 활용을 이야기한 《지식의 편집》도 있다. 니나 가르시아가 패션으로 편집을 이야기한다면, 마츠오카 세이고는 지식으로 편집을 이야기한다. 편집은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아무리 죽을 때까지 뇌 용량을 다 못 쓴다고 해도 어쨌든 사람이 담는 양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서랍장을 꾹꾹 눌러 담으면 장도 성치 못하고, 옷도 상한다. 3년이 아니라 5년간 단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책이 있다. 단 한 번도 재생하지 않은 음악 파일과 동영상 파일이 있다. 언젠가는 꼭 보리라 다짐하지만 그 언젠가는 대체 언제일까.

필요할 때 다시 손에 닿기 쉬우리라는 이유로 난 갖가지 물건들을 여기저기 쌓는다. 하지만 이젠 내가 원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같은 음악 파일도 몇 개고, 음반을 고르면서 가지고 있는지 헷갈리고, 이 책이 있던가 갸웃하며 장바구니에 넣었다가 뺀다. 아니 그럼 왜 가지고 있는 거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애당초 필요할 때 온 집안을 다 뒤져서 원하는 걸 찾는 열정이 있다면, 내게 없음을 알고 빌리거나 사는 편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있는 걸 알면 게을러지더라. 솔직히 이젠 중국 관련 자료도 인터넷에서 다 해결된다. 책은 정말 부수적이다. 컴퓨터를 안 켜도 되고,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적인 장점을 제외한다면.

백 번 얘기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래, 버리는 거다. 버려야 다시 담을 수 있다. 어차피 과부하 걸린 상태고, 머릿속은 흐리멍텅하다.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외치며 최소한의 살림만으로 살 수는 없어도 당장 내가 가진 공간의 한계를 생각해 보란 말이지. 그래그래, 버리는 게 답이다.
그러니까 누가 내게 용기를!!!!!!!!!!!!!!!!!!!!!!!!!!!!!!!!!!!!!
하늘에서 뚝 떨어지든지.
2008/04/12 12:44 2008/04/1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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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삭 2008/04/12 18: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어디로 이사 가셔요? 의정부를 떠나는 건가요? 짬 나면 얼굴 좀 보여줘요. 요즘 글 보면서 왠지 지요님이 1년 사이에 많이 예뻐졌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리.
    저는 2년 이상 안 입은 옷 버리기는 잘하는데 책 버리기는 역시 서툴러서... 알라딘 중고샵을 애용하면서 그 판매액으로 새 책을 사고 있지요...(플래티넘 재등극 OTL)

    • 之窈 2008/04/12 21:55  address  modify │ delete

      헹... 요새 글 보시면서 의정부에서 의정부로 이사 간다는 걸 모르시다니 수상한걸요.

      분명히 이런 글 쓰면 언니처럼 반응하시는 분이 나오리라 예상은 했습니다만, 관심사를 속일 수야 없는지라 그냥 썼습죠. 아닙니다. 다른 글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잡티도 장난 아니고 살도 붙고, 난리 났어요.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니 발악하는 거 아니겠습니까아;;;

      패션에 대한 관심은 일단 지금 실천하고자 하는 최소주의와도 맥이 닿아 있겠고요, 지금은 돌아가는 흐름이 어떤지 궁금해서 보는 중이라 실전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는 미지수입니다. 당장은 게임 깨느라. -_-v

      중고샵 괜찮아요? 전 일단 아는 사람 주려고 정리 중이에요. 전에도 썼지만 공짜로 얻은 책 돈 받고 팔기도 죄송스러워서.
      전 골드에서 실버 가려고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호호.

    • 이삭 2008/04/13 00:32  address  modify │ delete

      일전에 보네거트 책 이야기하면서 이사가야 한다는 부분이 있어서 이사가는 건 알았지만 어디로 간다고는 안 써 있었는데;; 어디 또 따로 언급을 해놨수? 아시다시피 내가 좀 띨하잖아요^^;

    • 之窈 2008/04/13 14:49  address  modify │ delete

      언니! 언니가 띨하면!!! -_-+
      같은 의정부로 가는데 좀 더 구석이에요(중심이기도 한 이상한 동네. 뚜벅이 교통이 불편하거든요.). 덕분에 은둔자 모드가 가능할 듯하지요. 공기는 좋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요. ^^

  2. 황준식 2008/04/14 07:35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봐 내 보기에 자네 문제는 버리지 못하는 것 이전에 바리 바리 쌓아 놓는데 있는 것 같은데.
    요는 버리는 기술 보다는 필요 없다 싶은 것은 들여놓지 않는 것이 비장의 기술이라고. 나도 이걸 잘 못해서 조금만 방심하면 집안에 어느새 점령군처럼 늘어난 짐들을 보고 있게 되지만 말이야. 누군가 이사가며 던져놓고간 티비, 안쓴다고 아파트 관리인이 들여놓고 간 식탁, 옆집에서 우격다짐으로 준 의자들, 이것들이 어느새 나의 집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더라고.

    • 之窈 2008/04/14 13:17  address  modify │ delete

      들여놓지 않는다는 거 자체가 버리는 기술 아냐? 들여놓을 때는 필요하리라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 그 판단 자체가 쉽지 않다고.
      《판타스틱》도 제대로 다 읽을 거라 믿고 샀단 말이지. 이사갈 때 못 가져가지 싶다. -_-a

  3. ellyj 2008/04/14 14:49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이사 날짜 잡혔나요?
    뭘 많이 사는 사람은 아닌데(아! 책 빼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건 확실하고. 한번 버릴때 어마어마한 계획과 결심이 필요한 사람이라서 그럴꺼라 생각해요. 너무 잘 버리는 저보다 백배 나아요. 어쨌든 이번에 버릴때는(사실 옆에서 보면 입양시키는 사람같아요. -_-v ) 이사가 끼어있으니 고민이 많겠네요.

    • 之窈 2008/04/14 16:57  address  modify │ delete

      잡혔다오. 내달 13일이래. 방은 지금보다 좁아서 가구 배치로 골머리 중이야. 책장은 딱 두 개 둘 생각인데 지금으로선 거의 말도 안 된다 싶긴 하다. 아 정말 버릴 거야, 버릴 거야, 버릴 거야!
      난 잘 버리는 네가 부러운걸. 네 방의 그 깔끔함이란! 감동이었단 말이지.
      근데 내가 '입양시키는 사람' 같아? 정말? 왜지?
      내게 버리기 노하우를 전수해 줘. ㅠ.ㅠ

  4. ellyj 2008/04/15 14:5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버릴 사람이 누구에게 버릴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어떻게 버릴지 계획짜는 경우가 극~~~~~히 드물죠. 일단 접기로 했으면 아주 접어야 하는게 기술인데 그 정을 못떼니까 어려운 거겠죠. 정을 떼요.

    • 之窈 2008/04/15 21:20  address  modify │ delete

      아, 그렇구나. 요새도 버릴 책을 어떻게 버려야 하나 고민하느라 머리가 터질 거 같은데, 그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_-;;;
      그치만 좋은 사람 찾아가면 좋겠다, 생각하는 걸 멈출 수가 없어. ㅠ.ㅠ 포기해야겠지? 날도 급한데.
      고마워, 충고. 흑.

  5. lunamoth 2008/04/15 23:2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나름 전작주의자 연하면서 등뒤에서 쌓여만가는 책들이 사뭇 생각나네요.. 정말 "사람은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란 누군가의 말이 떠오릅니다만, 여전히 먼 얘기네요. 회자되는 GTD 방법론도 어찌보면 비슷한 얘기인것 같고요. "모든것을 수집하고, 2분만에 할수 있는것은 지금하고, 나머지는 요리저리 분리해서 머릿속의 짐을 덜자"?는...

    http://memoriesreloaded.net/2257378 요런 책상을 꿈꿔보긴 합니다만... 흙;

    • 之窈 2008/04/16 01:46  address  modify │ delete

      대충 책 욕심은 버렸는데, 읽지도 않고 쌓은 책을 그냥 버리기는 아쉬워요. 그리고 버려야지 싶은 책들 중에서 좋은 주인 만나면 잘살 텐데 하는 책도 있고.
      책장 두 개 정도로 수납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겠어요. 만화책만 해도 넘어갈 듯하거든요. ㅠ.ㅠ
      이루릴 댓글대로 좋은 주인 운운할 것 없이 그냥 싹 버리는 편이 나을지도(가슴 한쪽이 아릿하군요.).

      링크된 사진을 보니, 그건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런 살벌함이라니! 책 한두 권은 있어 줘야!!! 하다 못해 포스트잇이라도 두어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