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즈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탐정이다. 첫정이란 무서운 법이라, 이제는 셜록 홈즈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파이프로 담배를 피우는지, 홈즈의 악기가 바이올린인지 비올라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엉터리가 됐지만, 홈즈 하면 그래도 가슴이 설렌다. 음, 이것만 남았나 보다.

그래서 크리스 콜럼버스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도, 설정이 엉터리라고 외칠지언정 《피라미드의 공포》에 열광했다. 하하, 나 이거 극장에서 본 세대라오. 말도 안 되더라도 홈즈니까, 왓슨이니까, 막판에 모리어티도 나오니까 그냥 좋았다. 그리고 잭 더 리퍼와 프리메이슨을 다뤘던 영화 《셜록 홈즈의 눈물》도 좋아한다. 이건 KBS 명화극장에서 이 제목으로 해 주었고,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소루 님 블로그에 있다. 난 크리스토퍼 플러머도 좋아했으므로, 피 나오는 영화를 못 보는 주제에 녹화까지 했더랬다.

한때는 홈즈 관련으로 파일도 만든다고 연습장 가득 홈즈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 두기도 했는데, 이사하면서 그냥 버렸다. 어렴풋한 애정만 남기고 기억도 뭣도 다 버리고, 하하. 홈즈 책은 하나도 없다, 이젠.

자기 전에 한 꼭지씩 읽으면 딱이겠다 생각하고, 출판사에서 가져온 그대로 쇼핑백에 들어 있는 책을 꺼냈다. 뭐, 하루에 한 꼭지는 어림도 없었고, 중간에 병원에 있었으므로 막판에는 그냥 막 읽었다. 즐거웠다. 예전의 원작에서 살짝 언급되던 사건을 가지고 만든 이야기라는 점에서, 왠지 정말 미공개 사건집을 읽는 느낌이었고, 오랜만에 읽는 홈즈 이야기라 그때 느낌도 소록소록 나서 반가웠고.

다만 팬픽은 팬픽인지라.
대체로 사건 전개도 정형화돼 있고, 홈즈도 정형화돼 있다. 잉. 내가 엉터리 팬이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람 만나서 너 뭐했지, 어떤 인간이지! 하고 맞히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어? 그리고 언니들이 그렇게 많이 나왔고, 홈즈가 언니들한테 그렇게 잘했어? 못했다는 게 아니라, 잘했는지 못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아. 여자에 대해 좀 재수 없게 말하는 건 알지만, 그 뒤로도 워낙 싸가지 없는 남자 탐정들이 많아서 그쯤이야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는 바람에 더더욱 기억이 흐릿. 그리고! 아니, 어떻게 편마다 이렇게 왓슨에 대한 애정을 폭발시키는 거야, 홈즈? 그 은근한 애정은 어디로 가고? 내 몹쓸 기억에 의하면, 만날 왓슨 놀려먹다가 결정적일 때 한마디 살짝 던지지 않았어? 그래서 뭔 사건이었던가 왓슨이 총인가 맞고 홈즈 당황하던 때 무지 기뻤는데. 이 책은 뭐, 대놓고 분위기 확확 보여 주던걸.

뭐 그래도 즐거웠음. 그저 불만이라면 정형화. 다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지. 홈즈의 예전 원작 분위기를 잘 살려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마지막 편에서 은퇴한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왓슨이 사건집 정리하는 묘사는 참 좋았다. 늙어서 친구랑 그렇게 같이 사는 것도 즐거울 거야. 내 바람 중 하나이기도 하고.

홈즈 관련으로 책이 좀 나왔던데, 언제 기회가 되면 하나씩 봐도 즐겁겠다.
사실은 근간에 본 이런 소설로는 소루 님 추천으로 본 《판타스틱》의 닐 게이먼 작품 〈에메랄드 색 연구〉가 좋더라. 패러디인데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봤다. 마지막에서 감탄도 하고. 멋졌음.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도 나름의 미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 취향은 이쪽이었다고나. (그런데 써 놓고 보니, 나 어째 홈즈 팬이고 뭐고 소루 님 팬이라고 공언하는 기분이야. -_-;;;)
마지막으로, 지호가 이 책 재판 찍을 때 해 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면 완전 오케이.
2009/06/21 19:48 2009/06/21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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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unamoth  2009/06/21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http://www.apple.com/trailers/wb/sherlockholmes/ 셜록홈즈 2009년판이랍니다! 이런것도 전 좋은걸요 ㅎㅎ
    • JIYO  2009/06/21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빠, 이거 언제 적 이야기인데 이제 얘기를...; 힝, 그래도 트레일러 안 보고 여태 참았건만, 결국 보게 만드는군요. 하여튼... -_-+++

      트레일러 본 감상은 아주 복잡다단하지만, 뭐, 새로운 시도니까. 개봉하면 일단 보기는 볼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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