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주문하는 곳에서 받은 차 견본품 중에 웨지우드의 위크엔드모닝이라는 홍차가 있다. 받은 지는 제법 되는데 언제고 주말 아침에 여유롭게 꼭 마셔야지 하고는 여태 마시지 못했다. 한가로운 주말도 없었거니와 나의 끝내주는 기억력 덕분이다. 주말 늦은 오후에 이 차가 떠올라 혼자 제 머리를 쥐어박은 적도 많다.

오늘 새벽 세 시 무렵, 더는 못해 먹겠다고 중얼거리고는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워 버렸다. 대충 두 주 내내 잠은 자되 푹 잔 적이 없고, 신경은 곤두서 있는 상태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 주는 아예 두문불출하고 집에만 있었다. 운동도 전혀 못 가고 정신만 제대로 있으면 책상 앞에서 원고와 씨름을 했다. 지난주에는 그 주말만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고, 이번 주에는 이번 주말만 지나면 숨을 돌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림없다.

일곱 시경에 알람에 시린 눈을 비비면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여덟 시에 일어나 《대송검시관》을 봤다. 지난 주말에는 밤새고 자느라 놓쳤다. 두 편을 연달아 본 뒤 씻고 밥을 먹고 물 끓여 위크엔드모닝을 우려 이렇게 책상 앞에 앉으니 열한 시다. 책상 위에는 어제 보다가 더는 못해 먹겠다고 집어던진 일이 망연히 날 보고 있다.

결국 오래도록 거래해 오던 출판사 한 곳에 말을 넣고 말았다. 이제 일 그만 받겠다고. 그쪽 책 참 좋아하고 내가 집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처음으로 일을 준 곳이라 나름대로 미련이 꽤 컸지만, 그래서 정말 오래도록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버틸 수가 없었다. 받는 일마다 수월은 둘째 치고 진이 다 빠졌다. 다른 일은 할 수도 없고 그것만 잡아도 일정이 빠듯했다. 결과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정작 내 일인 편집은 제대로 볼 수도 없었고. 자괴심만 늘고, 하나를 오래 붙잡는 통에 돈은 돈대로 못 벌고. 성격 탓인 거 안다. 뭐, 다 내 탓이지. 반성한다. 반성은 하는데 참 개선은 안 되더라. 팔자는 정말 성격대로 가는 법인가 보다.

난 늘 나 자신을 의심한다. 난 날 믿지 않는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난 생각한다. 내가 잘못된 인간인 걸까. 남들은 잘만 해 나가는데 난 왜 늘 이렇게 어긋나는 걸까. 타협조차 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라면 차라리 낫겠다. 결국은 주저앉으면서, 장인 정신을 발휘하는 프로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아등바등하다 제풀에 지치는 걸까. 사회성도 부족한데 성격도 까칠하고, 실력도 없다. 실력이라도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개겨도 멋지긴 할 텐데.

이상하다는 소리를 제법 들어선가, 남들과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자꾸 내 속을 뒤집어 본다. 내 뭔가가 잘못된 건지, 정말 내가 이상한 건지, 내가 뭘 잘못한 건지. 지난 친구 결혼식 때 만난 지인의 태도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뭘 잘못 생각한 걸까. 우습게도 감각에 대해서도 그렇다. 지난 《다크나이트》도 이번 《앤티크》도 다른 사람들과 내 느낌이 이렇게 다르면 내가 잘못한 거 같다. 내가 이상하고 잘못하고 남들과 달라서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것 같은 거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생각이 꽤 강한 편이지만, 이럴 때는 정말 왠지 내가 잘못하는 느낌이 든다. 조금 무섭고 두렵기도 하다. 내가 괜찮은 건지.

자기 의심이 너무 강하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아가지 못하면 그냥 이대로 있지 생각하기도 하지만, 대외적인 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적으로도 나아지지 못하고 내내 주저앉아 있다면 삶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데 나아지는 건 대체 무엇일까. 무엇보다 ‘내’가 나아진다는 건.

그래서 누군가 날 좋아해 주면 잘 믿지 못한다. 믿기가 두렵다. 나 같은 걸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좋아하는 데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믿는’ 건 다른 문제다. 그러면서도 애정을 원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 원하는지도. 아, 인생 참 어렵게 산다. 나도 안다.

비가 왔던 어제는 부연 창밖을 보면서 차가운 공기 속을 싸돌아다니고 싶었다. 집에만 있다고 부모님께 끌려 나왔던 엊그제 저녁의 공기는 몹시 서늘했다. 이제 겨울 코트를 내 입어도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밤에는 아직 시리우스가 뜨지 않았다. 다음 주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운동을 가리라 결심한다. 오면서 시리우스도 보고.

어쨌든 또 한 주 갔고 새 한 주 시작이다. 이 일요일 아침, 여전히 눈은 뻑뻑하고 일은 첩첩산중이다. 위크엔드모닝, 맛있다. 뒤에 남는 단맛이 아주 좋구나.

2008/11/16 12:01 2008/11/1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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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oreas 2008/11/17 13:2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잘 들어 시몬

    자신을 믿지 마

    날 믿어

    널 믿는 나를 믿어!"

    - 천원돌파 그렌라간

    • JIYO 2008/11/18 00:37  address  modify │ delete

      바쁜 것 같아도 참 애니 잘 챙겨 본단 말이지. 이건 또 언제 봤어? 난 이거 제목 볼 때마다 만 원은 안 되나, 십 원은 어떨까, 백 원은? 이런다;;; 재밌냐?

      고맙다.

  2. 자줏빛노을 2008/11/18 00:4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남에게 사랑받는게 그다지 익숙한거 같지는 않군요... 헤에....

    요즘들어서는 버림받는 것에 익숙해져간다는 느낌도 살짜쿵 들구요... =_=;;
    (.... 어이 그래선 안되.... 하면서도 이런 안좋은 느낌이 든다는건.... 제 두뇌는 저랑 별개의 존재인듯;)

    왠지 이번 글은... 너무 공감이 가버려서 불안합니다. -_-;;

    저도 뭐 내세울 거 하나없고, 애정을 바라면서도 거기에 추가로... 새로운 사람을/것을 찾는데에는
    겁이 많으니까요... 뭐... 그런겁니다.

    • JIYO 2008/11/18 02:52  address  modify │ delete

      공감 가면 좋은 글도 아니지만, 불안은 또 뭡니까. 저랑 동격이 되는 게 영 마뜩찮아서? 그러면 이해는 갑니다;;; 이런 글 주인과 동격이 되는 건 저라도 싫을 듯해요.

      요시나가 후미의 앤티크 뒤편을 보면 다치바나가 그런 말을 하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으면서도 사랑을 원한다고. 할 수 없는 걸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걸 찾기에 겁이 많은 건, 이쯤 되면 이기주의밖에 안 남잖아요. 상처를 받으면서도 친구 유지하고 놀고 깊어지는 건 그래서 어릴 때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힘들죠. 귀찮기도 할뿐더러.
      뭐, 저야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습니다만. (바보라서 그래요;;;)

  3. 이루릴 2008/11/18 14:1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난 지요라는 사람을 좋아해요. 인간으로 친구로 의지되는 사람으로.
    그러나 나는 지요라는 사람이 날 믿지 못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나도 날 믿지 않아요. 그건 누구보다도 잘 알꺼라고 생각해요.
    이런 날 보면서 해 줬던 말 그 말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4. 자줏빛노을 2008/11/18 23:4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지요님과 동급정도라도 되면 좋겠습니다만.... -_-;;;

    음울한건 동급이고 미래는 더욱더 암울하다고 (본인이)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불안하겠지요... -_-;;

    적어도 지요님 홈피보고 있으면, 이러저러한 긍정적인 틈(?)이 보입니다만..
    전 요즘.... 부정적인 틈만 보고 산다는게 문제지요... 에휴... ㅠㅠ

  5. 비밀방문자 2008/12/11 23: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JIYO 2008/12/12 18:33  address  modify │ delete

      왠지 단단하게 자기 길을 밟아가고 있다고 여겨졌던 분인데 그런 생각을 하시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지금 가는 길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돌아본다고 나아지는 건 아니니(반성과 재기의 바탕으로 삼는다면 모르지만, 보통 그러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지금 앞을 보시고 즐겁게 지내시길 빌어요. 저도 노력 중이에요. 몇 년 뒤에는 서로 어떤지 또 보는 것도 힘이 될지 모르지요. 열심히 살아 주세요.